[기초를 다지자] 23. 그림값 공개않는 화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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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평소 가깝게 지내는 미술평론가 金모씨가 최근 우리 화랑에 들러 미술품 값 때문에 낭패를 겪었던 일을 털어놨다.

그는 얼마 전 한국을 처음 찾아온 프랑스 유학시절의 친구 이사벨 여사와 함께 미술의 거리인 인사동과 사간동을 찾았다고 한다.

미술의 본고장에서 온 그녀에게 우리 미술의 잠재성을 한껏 뽐내며 이곳저곳 화랑 나들이로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틀 후 다시 만난 이사벨은 평론가에게 가격표를 공개하지 않는 화랑 풍토를 비판하며 "고객을 배려하지 않는 한국에선 컬렉터(수집가)를 길러낼 수 없을 것" 이라고 잘라 말했다.

金씨는 무척 당황해 이유를 물었다. 이사벨은 한국 미술에 매료돼 그를 만난 다음날 그림을 사기 위해 나들이 때 점찍어 놓은 화랑을 혼자 찾아갔다고 했다.

그녀는 관람객을 위한 작품 가격표를 찾았지만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어로 화랑 직원에게 "가격표가 어디 붙어 있느냐" 고 물었다. 그러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결국 화랑 문을 나서야 했다.

다른 화랑에서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가격표가 없어 종이를 꺼내들고 값을 적으며 작품을 고르다 보니 나중엔 너무 골치가 아파 끝내 그림 사는 것을 포기했다" 고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나 미국.영국 등 문화 선진국의 화랑에 가면 관람객용 가격표를 만들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화랑에 따라 가격표를 투명 파일에 담아놓거나 아예 한장씩 집어갈 수 있게 A4용지에 적어 쌓아놓기도 한다.

우리처럼 고객이 작품 값을 화랑측에 일일이 물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요즘 불황으로 문닫는 화랑이 늘고 일부 화가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화랑은 일반인들이 미술품을 쉽게 접할 수 있게 작품 가격을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 선진국을 이루는 첫 걸음이 아니겠는가.

이명옥 <갤러리 사비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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