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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42) 후퇴 속에 거둔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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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수백 명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너무 기쁘다. 우리 이제 다시 전력을 회복해 다시 한번 적과 싸워보자….” 그렇게 외쳤던 것 같다. 장병들도 오랜만에 사단장과 만나는 게 기뻤던 모양이다. 그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화답했다.

청주로 향했다. 지연전술을 계속 펴야 했다. 적을 만나면 최소한의 타격으로 최대한의 손실을 입히곤 뒤로 빠지는 ‘히트 앤드 런(hit and run)’이었다. 그러면서 미군과 연합군의 지원군을 기대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청주를 거쳐 증평으로 오니 국군 6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춘천에서 역사에 남을 항전을 펼쳐 적을 최대한 저지했던 우수 사단이었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과 정보참모 유양수 소령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전쟁 전 강원도 탄광회사에서 징발한 트럭이 많아 기동력이 우수했고 전투력도 그에 못지않은 사단이었다. 개인화기와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던 우리 사단 입장에서는 부럽기 짝이 없었다.

춘천에서 음성 쪽으로 이동한 6사단은 당시 또 큰 공을 세웠다. 임부택 중령이 지휘하는 7연대 휘하 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가 북한군 1개 연대를 섬멸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대는 약 600명, 연대는 3000명으로 이뤄졌다. 충주시 인근 동락리의 국민학교(초등학교) 여교사가 북한군 주둔 장소를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군 동태를 파악한 7연대 2대대가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 기습공격을 펼친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간신히 사단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서글픈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증평에서는 잠시 즐거웠다. 현지 농협 창고에 쌀이 가득 들어 있었다. 농가에서 소와 돼지를 사서 잡았다. 아마 나물도 어떻게 구해 왔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성찬(盛饌)이었다. 포만감에 잠시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다.

6·25전쟁 발발 12일 만에 적의 전투기가 처음 격추됐다. 미군 조사반이 1950년 7월 7일 서울 남쪽에서 격추된 소련제 야크 전투기를 살펴보고 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위장하기 위해 소련군 표식인 ‘흰 테두리가 달린 붉은 별’을 기체에서 지우고 대신 북한군 마크인 ‘푸른 원과 붉은 원 가운데 붉은 별’을 그려 놓았다. [미국 육군부 자료]

부대원들을 점검해 보니 병력은 어느덧 5000명 수준으로 늘어 있었다. 전선에서 밀려 흩어지면서도 끝까지 제 부대를 찾아와 합류한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세의 침략에 흔들리면서도 이 땅을 지켜 낸 동력은 항전의지를 갖춘 국민에 있다는 점이 새삼 느껴졌다.

우리는 1950년 7월 8일 백마령을 넘어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방어 임무를 교대해야 했다. 7연대장인 임부택 중령은 마침 동락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바로 방어 임무를 맡기에는 우리 사단의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들어 그를 설득했다. 바로 이동하지 말고, 준비가 될 때까지 1사단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어쩌면 애걸이었을지도 모른다.

임 중령은 그런 나의 궁색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7연대는 1사단과 함께 방어전에 임했다. 7연대 포병이 사단 정면을 엄호해 줌으로써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임 중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이 일로 김종오 6사단장에게 혼이 났다. 김 사단장은 “왜 이동하라는 나의 명령을 어기고 맘대로 작전을 펴느냐”면서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어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음성을 떠난 1사단은 거센 빗줄기를 뚫으면서 괴산을 거쳐 속리산 동남쪽 기슭인 경북 상주군 화령장에 도착했다. 17연대가 먼저 와 있었다. 전쟁 초기 옹진반도를 수비했던 육본 직할 부대였다. 미 25사단 24연대도 합류했다. 부대를 이끄는 호톤 화이트 대령과는 구면이었다. 내가 전쟁 전 정보국장 재직 시절에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해방 후 점령군으로 왔던 미 24군단의 정보참모를 맡고 있었다. 그와 나는 당시 “우리는 서로 성(姓)이 같다”면서 어울리곤 했던 사이였다. 화이트는 하얀색, 한자로 백(白)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이라도 전쟁 통에 만난 지인(知人)이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 이미 50을 넘긴 나이였다. 그 휘하의 연대 병력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말하자면 흑인으로 구성된 연대였다. 그는 “전쟁은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해. 나는 나이가 많아 고지에 오르는 게 힘들어”라며 푸념을 했다. 산악지형이 많아 이를 오르내리는 데 숨이 벅차다는 불평이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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