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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 본 정치] 국회의장의 정치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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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검찰 수뇌부의 탄핵안 처리가 무산된 19일 국회 인터넷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만섭(李萬燮)의장도 별 수 없군요. 정말 실망했습니다." (ID명 이민심)

불과 이틀 전만 해도 李의장은 탄핵안을 둘러싼 여야 대치국면에서 '국회법대로' 를 외쳐 네티즌들로부터 "젊은 오빠 파이팅" 이란 격려를 받았다.

李의장에 대한 이런 평가가 헝클어진 본질은 무엇인가.

◇ 젊은 오빠와 노회한 정객

국회법 제10조는 '의장은 국회를 대표하고 의사를 정리하며, 질서를 유지하고 사무를 감독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사전(辭典)적 의미일 뿐이다. 협상.대화보다 대립.갈등으로 지새우는 우리의 의회정치 풍토에서 국회의장은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파행을 정리하는 심판자의 역할을 강요받아 왔다.

탄핵안을 놓고 상정불가(민주당)와 직권상정(한나라당)사이에서 李의장이 국회법을 앞세워 직권상정 의사를 밝힌 것은 적극적 심판자 역할을 자임했다는 평가를 한때 낳았다. 반면 "당신도 민주당원" (徐英勳대표)이라는 민주당의 불만이 쏟아졌다.

17일 밤 본회의 상정이 우여곡절 끝에 불발로 그치자 이번에 李의장은 "노회(老獪)한 곡예사가 여당과 짜고 벌인 작태" 라는 한나라당의 성토에 직면했다. 사면초가 속의 李의장은 지금 "하늘에 맹세컨대 민주당과 짜지 않았다. 가슴이 아프다" 는 말만 하고 있다.

숙명여대 박재창(朴載昌.행정학)교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국회의장이 심판관 역할을 하려다 마지막 순간에 그만뒀기 때문" 이라고 진단했다.

朴교수는 그 원인을 독립적인 힘과 지지기반이 없는 의장이 갖는 현실적인 한계라고 했다.

"선출될 때부터 李의장은 평의원들의 자유의사가 아니라 여당, 정확히 말하면 대통령의 지지를 기반으로 해 당선됐다" 는 것이다. 집권당 출신 국회의장이 갖는 한계는 여러번 실증됐다.

김영삼(金泳三)정권 시절인 1995년 봄 지방선거법을 둘러싼 첨예한 대치국면에서 여당 출신 황낙주(黃珞周)의장은 청와대로부터 날치기 처리를 요구받았다.

야당 의원들의 의장공관 점거라는 헌정사 초유의 상황에서 날치기를 자의반 타의반 거부한 黃의장은 이후 대노한 YS로부터 '공관 밖 출입금지' 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 국회의장의 당적이탈 문제

삼권분립 속에 국회의장은 입법부 수장(首長)이다. 그러나 국회의장 선출부터가 대통령의 낙점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의원들조차 의장을 '우리의 대표' 로 간주하지 않으며 의장의 소신은 종종 '쇼' 로 비춰진다.

朴교수는 "국회의장이 공정한 심판관으로서의 역할을 존중받으려면 최소한 당적(黨籍)을 이탈해야 한다" 고 말했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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