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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보다 많은 ‘비둘기’… 출구전략 가능성 낮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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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03면

지난해 12월 16일 오후 2시.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대회의실 문이 열렸다. 신전 지성소(至聖所)를 가린 장막이 걷히는 듯했다. ‘돈의 신전 제사장’으로 통하는 벤 버냉키 의장을 비롯한 미 금융통화정책 거물 17명이 걸어 나왔다. 뒤이어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을 전담해 작성하는 브라이언 매디건 의장 비서 등 FRB 실무자들이 우르르 나왔다. 2009년 마지막 FOMC가 끝난 것이다. 그날 “위원들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올해 4명 교체, 美 FRB 성향 분석해보니

그들이 왜 피곤했는지는 20여 일 뒤인 올해 1월 6일 밝혀졌다. 공개된 의사록엔 그날의 치열한 논쟁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몇몇 위원은 “주택시장이 여전히 불안하다”며 “모기지담보부증권(MBS)을 더 많이 사들여 주택시장에 돈을 더 대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하는 위원들은 “충분한 자금을 공급했고 주택시장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어 이제는 비정상적인 정책(MBS 매입 등)을 그만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쪽은 인플레이션 전망을 놓고도 정면충돌했다. MBS 매수를 늘려야 한다는 쪽은 경제가 아직 불안하다고 진단했다. 고용사정이 나쁜 점을 유달리 강조했다.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했다. 연방정부의 경기부양을 계속 지원하는 통화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하는 쪽은 금융시장이 안정돼 제구실을 하기 시작한 점을 내세웠다. 경기 회복도 본궤도에 올라 자칫하면 ‘추악한 얼굴(인플레이션)’이 고개를 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금리를 당장 올리지 않더라도 경기부양을 지원하는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깨져버린 ‘위기의 컨센서스’
전형적인 비둘기-매파의 논쟁이다. 비둘기파는 경제성장·고용을 중시하는 쪽이다. 매파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야 성장·고용이 가능하다는 쪽이다. 중도파는 성장과 인플레이션 억제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쪽이다. FRB 이사를 지낸 프레드릭 미시킨 컬럼비아대 교수는 “FOMC에서는 중도파가 매파와 비둘기파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준다”고 말했다.

매파와 비둘기파의 격론은 최근 보기 드물었다. 글로벌 신용경색이 본격화한 2007년 8월 이후 FOMC 내부에선 컨센서스가 유지됐다. 이후 2년5개월 정도 FOMC 위원들은 발등의 불(금융위기)을 끄기 위해 한목소리를 냈다. 미묘한 시각차가 있기는 했다. 위기의 종착역에 대한 전망 차이였다. 비둘기파는 공황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매파는 경기 후퇴를 점쳤다. 그 정도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었다. 2008년 9월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그들은 한 걸음 더 나갔다. 근대 중앙은행 300여 년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실험을 감행했다. 은행뿐 아니라 국책 모기지회사로부터 MBS와 기업어음(CP)까지 사들였다. 월가의 ‘페드워처(Fed Watcher:금융통화정책 분석가)’들이 말하는 ‘위기의 컨센서스’ 덕분이었다.

지난해 마지막 FOMC의 논쟁은 위기의 컨센서스가 깨졌음을 시사한다. 의견 불일치는 경기 흐름이 불분명할 때 주로 나타났다. FRB 의장이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하거나 임명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도 곧잘 불거졌다. 가장 최근 사례는 1979년 9월 FOMC 회의였다. 그해 2차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가 요동했다. 폴 볼커는 당시 신출내기 의장이었다. 임명된 지 한 달 남짓이었다. 당시 FOMC 위원들은 인플레이션 억제와 경기부양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볼커는 인플레이션 사냥을 주장했으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FOMC는 기준금리를 소폭 올리는 선에서 타협했다. 시장은 혼란스러워했다. FRB가 인플레이션 사냥을 할지 경기부양에 나설지 분명한 신호를 주지 않아서다. 물가는 오르고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미 FRB 내부 의견이 79년 이후 가장 크게 엇갈리고 있다”며 “미 경제의 흐름이 분명히 드러날 때까지 의견 차이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미 경제 흐름이 지금처럼 불분명하면 FRB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도파도 비둘기에 가까워
FRB 실세는 버냉키 등 FRB 이사 5명과 지역 연방준비은행 총재 12명 등 모두 17명이다. 미국 자산운용사 노던트러스트 등 월가 금융회사들의 분석에 따르면 비둘기파와 매파는 각각 4명과 5명이다. 나머지 8명이 중도파다. 17명 모두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FOMC에 참여는 한다. 경제 상황과 금리 결정에 대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금리결정 투표권을 쥐고 있지는 않다. 이 가운데 버냉키 등 FRB 이사 5명과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늘 투표권을 행사한다. 상근 멤버인 셈이다. 나머지 지역 연방준비은행 총재들은 순서에 따라 1년씩 투표에 참여한다. 올해엔 클리블랜드·보스턴·세인트루이스·캔자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들 차례다(그래픽). 올해 FOMC에서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이 10명인 이유다. 올해 첫 회의는 26~27일 이틀 동안 열린다.

올해 FOMC 멤버 10명 가운데 비둘기파는 도널드 콘 FRB 부의장, 에릭 로젠그런(보스턴)과 윌리엄 더들리(뉴욕) 등 3명이다. 매파는 토머스 호니그(캔자스)와 케빈 워시 FRB 이사 등 2명이다. 최근 발언을 곱씹어 보면 중도파들 성향도 얼추 드러난다. 의장 버냉키는 전형적인 중도다. 경제가 잠재성장률 밑에서 맴돌고 있어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동시에 통화량 증가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커지는 것을 걱정했다.

버락 오바마가 임명한 대니얼 타룰로 FRB 이사는 통화정책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금융회사 건전성에 대해서만 발언했다. 하지만 백악관과 가까워 비둘기파에 가까운 중도로 분류된다. 샌드라 피아날토(클리블랜드) 총재도 비둘기파에 가깝다. 그는 “인플레이션이 억제될 것이라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물가 상승을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제임스 불러드(세인트루이스) 총재는 최근 “FRB가 MBS 등을 사들이는 바람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매파에 가까운 발언이다. 엘리자베스 듀크 FRB 이사는 은행가 출신이다. 돈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는 2007년 하반기 “신용경색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다”며 FRB가 돈을 푸는 것을 경계했다. 노던트러스트 이코노미스트인 애셔 뱅걸로는 “듀크가 태생적으로 매파인데 공공정책을 담당해 중립적인 척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올해 FOMC에는 비둘기파가 상대적으로 많다. 버냉키를 중심으로 비둘기파 5명, 매파 4명이다. 이 숫자만을 놓고 보면 올해 FRB가 출구전략 쪽으로 기울기는 힘들어 보인다. 위기의 컨센서스가 깨져 통화를 팽창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버냉키의 카리스마가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만 못해 새로운 컨센서스를 형성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올해 FOMC 회의장에선 입씨름만 무성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실물경제 호전 땐 얘기 달라져
올해 FRB가 출구전략을 쉽게 채택하기 힘든 이유는 또 있다. 오바마가 쥐고 있는 FRB 이사 지명권이다. 현재 두 자리가 공석이다. 당장 2명을 앉힐 수 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부의장 도널드 콘의 임기도 6월에 끝난다. 올해 안에 오바마는 으뜸패 3장을 꺼내 쓸 수 있는 셈이다. FRB 이사들은 FOMC 상근 멤버다. 금리 등 통화정책을 결정한다. 오바마가 고용 사정에 목을 매달고 있어 매파를 임명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가 비둘기파 2명을 임명하면 올해 FOMC 판도는 7대 4로 비둘기파 세상이 된다.

금융개혁 법안 처리 일정도 FRB 매파들에게 불리하다. 미 상원은 3월 금융개혁법안 처리에 들어갈 예정이다.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FRB에 대한 의회의 회계감사다. FRB의 돈 씀씀이를 의회가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FRB는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의회가 족쇄를 의논하고 있는 와중에 FRB가 정치인들이 싫어하는 긴축정책을 채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최근 전망했다.

미국의 실물경제가 눈에 띄게 좋아지면 모든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치적 변수는 의미가 없어진다. 경제가 정치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장을 해 실업률이 떨어지는 추세가 분명해지면 FRB가 독자적으로 출구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월가는 FRB가 올해 9월 이후 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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