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과 추억] 별세한 퇴계 15대 종손 이동은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이동은옹이 올해 9월 퇴계 종택 앞에서 아들 근필(뒷줄 왼쪽), 손자 치억(뒷줄 오른쪽), 증손자 이석과 자리를 함께했다. [최정동 기자]

“퇴계 할아버지께서는 일흔에 돌아가셨는데 당시로선 아주 오래 사셨다. 내가 조상보다 더 오래 살아 부끄럽다.”

23일 101세를 일기로 별세한 퇴계 이황 선생의 15대 종손 이동은 옹은 2007년 7월 가족과 문중이 마련한 백수연(白壽宴: 99세 생일)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옹은 당시 “집안 대대로 아흔을 넘겨 100세를 바라볼 때까지 산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고 했을 만큼 장수했다.

고인은 장수 비결로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을 꼽았다. 퇴계 선생이 정리한 건강법인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전하는 그대로 머리를 자주 빗고 이를 소리 나게 ‘딱딱’ 부딪치며 이마와 콧잔등을 수시로 문지르며 지냈다.

이 옹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 뒤편 퇴계 종택을 지켜 왔다. 일제 강점기에 경북중학에 다니기 위해 잠깐 대구에서 생활한 걸 빼고는 평생을 이 종택에서 살았다. 고인은 이곳에서 1975년 종손 자리를 이어받아 한해 20여 차례의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맞았다. 제사 때마다 많게는 200명 가량의 손님을 맞느라 고생하던 아내와 큰며느리를 10여 년 전 차례로 먼저 떠나보내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조상을 모시는 정성은 지극했다.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세수한 뒤 의관을 정제하고 퇴계 선생을 모신 사당에 인사한 뒤 아침을 들었다. 먼 곳으로 떠나거나 돌아올 때는 사당에 들러 꼭 참배했다. 전국 유림은 종택을 지키는 고인을 큰 어른으로 추앙했다.

고인의 5촌 조카인 이인환(57)씨는 “한일합방 등 격동의 한 세기를 사시면서 유교가 쇠퇴하는 시기에 고인은 유교 교육을 활성화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고 회고했다. 도산서원 성역화와 퇴계학연구원 설립 등에 앞장서고 박약회·담수회 등을 만들어 유림 화합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늘 열린 마음이었다. 도산서원이 여성들에게 알묘(謁廟: 사당에 참배함)를 허용하도록 했고 손자 부부가 한복을 입고 패션쇼에 나가는 것도, 학술회의에서 제사 혁신을 주장할 때도 “시대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라며 공감을 나타냈다.

이 옹의 장례는 퇴계 집안의 가풍에 따라 전통 유교 방식으로 간소하게 치러진다. 

글=송의호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