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년 맞는 5·18] 상. 한국현대사속의 '광주'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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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20돌이 다가오고 있다.

1980년 당시 ‘폭동’으로 낙인찍혔던 5·18은 강산이 두 차례 바뀌는 세월을 보내며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과 함께 국가기념일로 인정받고 있다. 망월동 묘지는 성역으로 조성됐고,여야 정치지도자와 군장성까지 참배행열에 동참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5·18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미친 영향의 결과이기도 하다.5·18의 의미와 그 영향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5·18연구소 주최 국제학술행사에 참석한 외국인들의 시각도 정리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 '5월의 노래' 중)지난 20년간 각종 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다.

이 노래는 5.18이 '폭도들의 난동' 으로만 알려졌던 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참혹상을 널리 알렸다.

"배운 자로부터는, 가진 자로부터는/값싼 동정밖에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군/다 앗기고 앗길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군/80년/5월 투쟁에서/70년대의 나의 피 나의 칼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갔던 사람들은" (김남주 '역시' 중)

5.18에서 목숨을 빼앗긴 많은 사람, 특히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숨져간 사람의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임을 안 지식인들은 참회하는 심경이 되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산 자여 따르라' 중) 부채의식을 지닌 지식인들은 민주화와 반독재 투쟁에 나설 것을 재촉하는 노래에 맞춰 줄지어 동참의 길에 나섰다.

중요한 것은 5.18을 알면서 민주화에 뛰어든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결국 그 힘으로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5.18이 지닌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박호성(서강대.정치학)교수는 "동학농민혁명과 유사한 사건" 이라고 규정한다.

"동학혁명이 지배계급의 개혁(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부패와 학정의 최대희생자인 농민들이 무장투쟁을 했듯 광주에서도 10.26 이후 민주화의 기대가 신군부에 의해 무산되자 민초들이 분기한 것" 이라는 해석이다.

김동춘(성공회대.사회학)교수는 "군부정권의 폭력성이 가시적으로 드러남으로써 민주화를 이룩해 공권력을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일인가를 가르쳐줬다" 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동학혁명에 비유될 만한 사건이었고, 그 중심에 민중이 서있었다는 사실은 5.18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역사 속에서 중요성이 확인된 민중의 개념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손호철(서강대.정치학)교수는 "분단 이후 좌파는 없이 우파만 남아 있었다. 그 상황에서 5.18은 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을 제고했고, 이후 민주화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고 평가했다.

장홍근(노동연구원 연구위원.사회학)박사는 "4.19 이후 지식인 중심의 다소 낭만적인 민주화운동을 대신해 민중 중심의 구체적 대안을 지닌 변혁이론이 등장한 계기가 됐다" 고 말했다.

좌파적 시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에 대한 비판이다. 안병욱(가톨릭대.역사학)교수는 "미국의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그동안 '좋은 나라' 로만 인식돼온 미국을 비판적으로 보게됐다.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점거농성등이 생기면서 학생이나 지식인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반미(反美)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고 말했다.

8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 좌파이론이 자리잡고, 민주화운동은 학생만 아니라 노동자.농민.빈민층으로까지 확산됐다.

민주화세력은 성장하고 조직화했으며, 그 결과가 87년 6월 항쟁과 6.29선언이다.

"5.18은 80년엔 패배했지만 87년에 성공했다" 는 평가다. 5.18의 영향과 성과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정관용(시사평론가)씨는 "YS정부가 들어서면서 하나회 인맥을 청산하는 등 30년 넘게 이어져온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근절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동요나 희생이 없었던 것도 5.18의 영향 탓" 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5.18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한 시각은 엇갈리고 있다. 98년 광주시에서 5.18관련 비디오를 제작해 전국 학교에 배포하는 과정에서 대구지역 언론인이 이를 비난하는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지역적으로 광주에 대한 평가는 많이 갈리고 있다.

안종철(광주시 5.18전문위원.정치학)박사는 "아직 일부 지역에서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정에도 인색한 부분이 있어 아쉽다" 며 "광주는 과거 저항의 의미에서 이제 인권.평화의 상징으로 세계화.보편화되어야 한다" 고 강조했다.

한편 손호철교수는 "5.18은 기본적으로 민주화운동이며,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국가보안법과 같은 비민주적 장치가 남아있다. 민주화을 위한 법률개정과 같은 일을 서두르는 것이 남아있는 5.18의 최우선 과제다. 이번 선거에서 드러났듯 여전히 깊은 지역간의 골을 메우는 작업도 시급하다" 고 주장했다.

아직 객관적 평가가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한영우(서울대.한국사)교수는 "피해자만 아니라 가해자도 아직 살아있다. 한 세대가 지나지 않은 사건은 아직 진행형이기에 역사적 평가는 이르다" 고 말했다.

오병상.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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