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노사가 모두 반대하는 복수노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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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노사정 갈등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노총이 두 가지 사안 중 전임자 임금 문제에 관해 조건부 수용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지난달 30일 긴급 기자회견에서 “원칙적으로 전임자 급여를 노조 스스로 부담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대신에 “노조가 (이 문제를) 자율로 해결할 수 있게 준비 기간을 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복수노조에 관해선 “허용은 물론이고 모든 노조가 사용자와 개별적인 교섭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기존 주장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180도 바꿨다. 이는 재계를 대표하는 경영자총협회(경총)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임자 문제와 함께 노사 간의 막판 타결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전임자 임금 문제에 관한 한국노총의 입장 선회는 정부의 강경한 의지와 노총 안팎의 여론에 떠밀려 한 걸음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경영계는 물론이고 근로자들도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에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의 입장 변화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뒤늦게나마 받아들이려는 의지 표명으로 노사관계 선진화에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다만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준비기간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시행 가능 시점을 못 박고 준비기간도 가급적 단축시켜 ‘유예를 위한 시간 벌기’라는 의혹을 없애야 할 것이다.

복수노조 허용에 관한 입장 변경은 노동시장에 대한 현실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강성 노조일수록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복수노조 도입은 선명성 경쟁으로 노사관계를 지금보다 훨씬 악화시킬 소지가 있다는 노동계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노총 고위 관계자는 “조합원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다투어 목소리를 높이게 되면 결국 투쟁적 노조가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는 그동안 노동문제 해결의 잣대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실용성이며, 당사자 간 합의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지적을 거듭해왔다. 전임자 임금 문제는 정부와 경영계는 물론이고 이제 최대 노동단체인 한국노총이 원칙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정책시행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복수노조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제도 도입 후 교섭창구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정부 입장에 노동계는 근로자 권익 증대에 위반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경총도 교섭비용 증가와 강성 노조 출현에 따른 사업 차질 등을 우려하고 있다. 어제 노동부는 “내년 1월부터 예정대로 복수노조를 허용하되, 3∼6개월의 계도기간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강행 방침을 거듭 밝혔다. 13년째 유예된 제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정부 입장은 이해된다. 그것이 국제기준을 따르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행에 따른 득과 실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만에 하나 감당할 수 없는 부작용이 빚어진다면 애써 도입한 제도는 애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시행에 급급하기보다는 노사 쌍방의 의견에 좀 더 귀를 기울이며 합의를 유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