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친일논란'에 움찔한 국사편찬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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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 위원장 이만열)가 당초 계획했던 '치암(癡巖) 신석호(1904~81)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학술지 발간을 취소했다. 치암은 한국 근대 역사학의 제1세대로 국편의 실질적 창립자이자 국편이 오늘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하나다. 하지만 그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수관을 지냈다. '친일파' 시비와 무관하지 못한 처지다.

경위는 이렇다. 지난해 9월 '치암 선생 1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 박성봉 경북대 석좌교수)가 발족됐다. 박 회장을 비롯해 강만길 상지대 총장, 최영희 전 국편위원장 등 치암의 직계 제자들이 중심이 됐다. 다들 우리 학계의 원로다.

기념사업회는 발족 직후 국편에 기념집을 펴낼 것을 제안했고, 국편은 이를 받아들여 국편의 기관지격인 '사학 연구' 제74.75호를 합본으로 한 치암 특집호를 이달 중 펴낼 계획이었다. '사학 연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에 '우수 잡지'로 등재돼 있어 원고를 게재하면 실적으로 인정받기에 원고 청탁도 순탄하게 이뤄졌다.

문제는 밖에서 터졌다. 정치권에서 친일진상조사법 개정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때부터 국가기관인 국편 내부에서 "분위기가 복잡해지니까 보류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내부 회의를 거쳐 취소하기로 결정됐다. 이만열 위원장은 지난달 박성봉 회장에게 서신을 띄워 "양해해 달라"고 당부했다.

국편이 친일논란에 휩싸일 것을 우려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피해간 셈이다. 하지만 더 한심한 것이 있다. 몇백년을 단위로 생각하는 역사학자들이 왜 불과 1년 앞을 내다보지 못했을까. 학술지 발간 취소가 '긁어 부스럼'을 피하려는 고육책이었다면 역사학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좋지 않은 선례가 된다.

어쨌든 역사를 담당하는 국사편찬위마저도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함이 드러났다. 게다가 정치권을 너무 의식하니까 모양새가 더욱 궁색해졌다. 역사학계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차제에 친일역사를 우리 손으로 규명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가.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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