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 칼럼] 흐트러진 총선판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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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4.13총선정국의 판도가 한나라당 공천후유파동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김대중(金大中)정부의 중간평가로 초점이 모아졌던 16대 총선거의 성격이 흐트러지고 있다. 고급옷로비사건.언론문건파동 등으로 인한 민심이반으로 여당필패(必敗)라던 선거전망도 야당 분열에 따라 여당 유리쪽으로 기울고 있다.

한나라당이 분열되고 선거에서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무리한 공천을 한 이회창(李會昌)총재의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야당이 분열돼 또 하나의 지역당이 생기고, DJ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란 총선의 성격이 흐트러지게 된 것은 역사의 후퇴가 아닐 수 없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이번 총선을 현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로 설정하고 민주당 지지는 현정부 신임, 한나라당 지지는 현정부 불신임으로 등식화해 왔다.

그렇다면 '반(反)DJ 반 이회창' 을 내건 가칭 민국당에 대한 지지표는 DJ와 이회창 중 어느쪽 반대 성향이 더 강할까.

이렇게 총선 정국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여당을 돕게 된 책임은 전적으로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에게 있다. 물론 이번 한나라당 공천은 일정부분 개혁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구 공천에서 제외된 중간보스들은 대개 우리 정치의 부패.무실(無實)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그래서 퇴출대상으로 거론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李총재가 간과한 것이 있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정치이지, 윤리.도덕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정치도 일정 수준의 윤리.도덕성을 지녀야 하지만 도덕이 정치의 중심 잣대가 되면 민주정치는 실종되고 만다.

정치지도자가 도덕성을 독점하면 민주정치의 기본인 비판과 반대의 자유는 숨쉴 틈이 없어진다. 도덕적인 기준에서 보면 퇴출시켜야 할 정치인도 내부의 역학관계상 자르는 부작용이 더 클 때는 한동한 싸안고 가는 것이 정치요 정치력이다. 결국 李총재측은 자기 힘을 모르거나 과신하고 남을 자르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보다 심각한 것은 이번 공천을 통해 李총재가 국민 일반에 독하다, 의리 없다, 포용력이 없다, 무서운 사람이다 하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민주화를 이룩하고도 포용력 있고 합리적이며 마음 편한 지도자를 갖지 못했다. 이런 지도력을 대망(待望)하던 사람들에게 한나라당의 공천파동이 과연 어떻게 비쳤겠는가.

李총재측의 과오가 크다고 해서 낙천자들이 신당을 급조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민주적 경선이 아닌 밀실공천인 이상 낙천자들이 공천결과에 불복해 탈당하거나 무소속으로 입후보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이들이 적극적인 명분이나 공통된 이념도 없이 지역주의에 기대 신당을 급조하는 것은 국민에게 설득력이 없다.

갑자기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이 신당 추진측과 저지측 인사로 문전성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게 남아 있는 부산.경남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업어보자는 얄팍한 뜻이 아니겠는가. 신당 결성은 결국 PK지역, 넓게 보면 영남의 지역감정에 기대는 또 하나의 지역정당 출현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그래서 듣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와 시대 흐름에 맞는 일인가.

이런 가운데 국민을 더욱 어지럽게 하는 것은 자민련의 야당선언이다. 현정부 출범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공동여당으로 집권프리미엄을 실컷 누리다가 총선을 앞두고 공조파기.독자노선을 선언하면서 정작 총리를 포함한 파견인사는 소환치 않고 있다. 선언의 진의가 뭔지 헷갈릴 뿐이다.

4.13총선이 4파전으로 가면 김대중정부 중간평가란 의미는 약화된다. 어느 당이 과반수 의석을 단독으로 확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웬만한 국정 수행을 위해선 야당과의 대화와 협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가 될 것이다.

선거과정에서부터 집권당이 총선승리에 대한 집착을 접고 공정.공명 선거를 솔선해 책잡힐 일이 없도록 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성병욱<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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