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주말향기] 시할머님과의 목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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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대전 본가의 어른들을 찾아뵈었다. 추석을 앞두고 시할머니 목욕과 빨래, 청소를 하고 다음 주 벌초에 필요한 예초기며 오일 등을 미리 챙기기 위해서였다.

일요일이라지만 새벽잠이 없으신 아버님과 시할머님의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아침 식사도 이른 시간에 하시는 어른들을 위해 서둘러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일요일인 만큼 늦잠을 자도록 하고 나는 시할머님을 모시고 목욕탕으로 갔다.

이렇게 할머니와 목욕을 한 게 어느덧 10년이나 되었다. 처음 시할머님을 모시고 목욕을 갔을 때는 참으로 어색하고, 솔직히 싫었다. 일찍이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6명이나 되는 손녀와 손자를 키우셨지만 목욕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분이셔서 그런지 할머니는 목욕탕이란 곳을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탕 속에서 부력으로 몸이 떠오르자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시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게다가 사우나나 찜질방에 익숙해진 요즘 어른들과는 달리 할머니의 피부는 아기처럼 연약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단순히 노인들은 뜨거운 물을 좋아할 거란 잘못된 생각으로 무심코 뜨거운 물을 부어 할머니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겹겹이 쌓였던 세월의 두께는 또 얼마나 두껍던지…. 주위 사람들이 행여 싫은 내색이라도 할까 싶어 연신 물을 뿌려드렸다. 주름이 잡힌 할머니의 뱃살과 젖가슴을 들춰가며 깊이 숨어있는 때들을 찾아낼라치면 이마엔 땀이 맺히고 더 이상 내 몸의 때를 밀 힘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

만삭이 되어서 할머니의 몸을 씻겨드렸을 때는 비쩍 마른 배불뚝이 손자며느리가 그러는 게 힘겨워 보였는지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내 등이라도 밀어주겠다며 베푼 선심 덕에 등껍질이 훌러덩 벗겨지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솔직히 할머니의 목욕을 도맡아 도와드리면서 전생에 내가 때밀이가 아니었을까 불평하기도 했다. 두 아이의 목욕도 내겐 힘에 부칠 때였으니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의 목욕 일이 왜 힘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면서 나는 할머니에게 감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추석 즈음에 목욕탕에 올 때는 할머니가 올해도 무사히 건강하게 넘기시기를, 민속의 날을 즈음해서는 지난 한해를 무사히 넘기고 새해를 맞게 됨에 감사하게 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는 여느 때처럼 할머니의 주름지고 딱딱해진 얼굴에 로션을 발라드렸다. 올해는 쌀겨와 우유를 섞어 마사지도 해드렸다. 할머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가만히 계신다. 로션을 바를 때는 10년째 계속 "그기 뭐이나?" 하신다.

"예뻐지는 거예요. 할머니 예뻐지시라고요"라고 말씀드리면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웃으신다. 올해로 91세. 세월은 할머니를 먹어도 할머니는 세월을 먹지 않았다.

최원실(35.서울 도봉구 창동 주공3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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