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미국의 무역규제에 대비해야 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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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지난해 WTO 회원국들의 반덤핑 관세 부과는 208건으로 2007년(163건)에 비해 28% 늘었다. 상계관세 부과도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34건으로 그 직전 1년간 17건에 비해 두 배로 급증했다. 최근 반덤핑 관세 부과 등의 조치를 하고도 WTO에 보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점을 감안하면 실제 증가 폭은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역시 수입품에 대한 무역규제를 크게 늘리고 있다. 올해 미국의 반덤핑·상계관세 부과는 14건으로 이미 지난해의 두 배에 달한다.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이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저가 수입품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5년간 한국은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무역규제를 받은 국가다. 하지만 올해는 미국이 한국 제품에 대한 덤핑이나 보조금 지급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다. 한 건의 보조금 협정 위반 조사가 있었으나 미국은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결론을 냈다. 미국이 석유 수송용 강관, 코팅용지 등에 대해 덤핑 조사를 벌여 중국·멕시코·인도네시아 기업들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지만 예상과 달리 한국 업체는 포함되지 않았다.

우선 금융위기의 여파로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가 크게 떨어진 덕을 봤다. 덤핑 판정의 근거는 수출가격과 내수가격이다. 통상 내수가격이 수출가격보다 비쌀 때 반덤핑 관세를 적용하는데, 금융위기 전 달러로 환산하면 비쌌던 한국의 내수가격이 원화가치 하락으로 싸지게 됐다. 이에 따라 금융위기 전에는 반덤핑 관세를 부과 받을 수도 있었던 품목들이 원화가치가 떨어진 덕분에 관세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불황으로 한국의 수출이 예전보다 위축된 점과 한국이 정책적으로 보조금 지급을 줄여나가고 있는 점도 미국의 무역규제를 받지 않는 요인이 됐다. 여기에 최근 미국이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면서 반사이익을 본 측면도 있다. 올해 중국 기업에 대한 미국의 무역규제 건수는 전체 건수의 86%를 차지하는데, 이는 2005년(60%)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현 상황에 안도해서는 안 된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그간 한국에 도움을 줬던 환율·수출 등 국제 여건이 지금까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기회복으로 원화가치는 빠르게 오르고 있고, 한국 기업들의 수출도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미국의 무역규제를 막아주던 장치들이 이젠 거꾸로 한국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의 통상마찰이 심해지면서 중국에서 제품을 생산해 미국에 수출하고 있는 한국 기업이 피해를 볼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나타나는 이런 위험은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은 국내외 판매전략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야 하며, 원화가치 상승에 따른 수출가격-내수가격 변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라면 ‘원산지 규정(Rules of Origin)’과 같은 ‘비관세 장벽’도 점검해야 한다. 미국은 중국이 ‘비시장 경제국(non-market economy)’이란 이유로 다른 나라보다 더 높은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세계 경기가 살아날수록 한국 기업들의 수출 기회는 늘겠지만, 그만큼 각국 통상 당국의 감시도 매서워지기 마련이다.

김석한 변호사·미국 워싱턴 애킨검프 법률회사 시니어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