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정원장의 '헤픈 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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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국가안보를 맡고 있는 국정원장이라는 고위공직자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관의 기밀을 함부로 누설하지를 않나, 자기가 모시는 대통령의 비사(□事)를 제멋대로 발설하지 않나, 국정을 운영하고 중요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인사들의 입이 너무 가볍고 무책임해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돼가고 있다.

국정원은 오랫동안 그들이 국내정치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들 수뇌가 한 말로 미뤄보면 국내정치에 상당히 깊이 간여해왔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는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을 미행한 사실을 시인했다.

鄭의원이 국정원에 해가 되는 행동을 많이 해 국정원 직원이 '자발적.본능적으로' 미행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근무기강이 어떻기에 상부의 아무런 지시도 없이 직원이 국회의원을 '본능적' 으로 미행할 수 있고, 또 그들의 보고를 어떻게 국정원장이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수도권 각종 선거와 민심동향 보고도 국정원이 과연 할 일인지 명백하게 밝혀야 할 대목이다.

국정원이 과거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처럼 집권세력의 정치적 지원역할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국민의 정부' 는 국가정보기관의 정치개입 배제를 약속했고 대북문제를 포함한 안보관련 정보수집에 그 기능을 엄격히 제한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최근에는 냉전종식 등 국제환경의 변화에 맞춰 국제정보.경제정보 등을 수집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변신 목표를 세워 기관 이름까지 바꾸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이 지금도 집권세력의 선거정보수집 및 동향분석과 국회의원 미행 등의 사찰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문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정부측의 엄정한 소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선자금문제만 해도 그렇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그동안 정치자금의 수수를 부인했던 적은 없었으며 다만 불법한 돈은 안받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겠다고 부적절한 사례를 듦으로써 97년 대통령선거 이후 세풍사건 등 대선자금 출처 때문에 줄곧 시달림을 받은 한나라당에 호된 역공(逆攻)의 빌미를 준 꼴이 됐다.

국가정보원장이 국가의 중요 정보를 언론에 설명하고 이해를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방식과 경로, 그 주제들이 적절해야 하고 사리에 합당한 사례를 들었어야 했다.

파업유도.언론문건사건 등 최근에 빚어진 많은 사건들이 공직자들의 '헤픈 입' 과 가벼운 처신 때문에 비롯됐다.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런 자질미달의 발언과 경거망동을 일소할 대통령의 엄단과 특단의 공직자 기강확립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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