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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도전 현장-일본] 9. 일본주식회사-성장에서 성숙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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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자상가로 유명한 도쿄(東京)의 아키하바라(秋葉原). 요즘 이곳에는 벤처기업의 쇼룸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다.

아키하바라의 흐름을 낚아채 상품화로 연결시키기 위한 '안테나 숍' 들이다.

이곳 KS빌딩 2층에 쇼룸을 낸 알파오메가 소프트. 35세의 사사키 다카마사(佐佐木隆仁)사장이 종업원 20명과 함께 목숨 걸듯 경영하는 벤처기업이다.

'세계최초' '세계유일' 의 소프트웨어가 궁극적인 목표고 적어도 '일본최초' '일본유일' 은 되겠다고 한다.

이미 이스라엘 첩보기관의 취조기술을 응용, 은행에 돈 빌리러 오는 사람들의 심리분석을 통해 신용도를 체크하는 소프트웨어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냈다.

이와이 히로코(岩井廣子)멀티미디어사업부장은 "민첩성과 창의성으로 '온리 원(only one)' 제품을 개발, 대기업을 반발짝 앞서 따돌리려 하고 있다" 고 말했다.

일본 벤처기업의 성공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알파오메가 소프트는 평범한 편이다.

손정의(孫正義)의 소프트방크는 이미 거인이 됐고 34세의 시게다 야스미쓰(重田康光)가 이끄는 히카리통신은 주식시가총액 12위로 히타치를 앞질렀다.

여린 '새살' 이 어느덧 '근육' 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환부' 를 도려내는 수술도 한창이다.

도쿄 외곽 무사시무라야마(武藏村山)시에 있는 닛산자동차 공장. 구조조정으로 폐쇄를 앞두고 준비작업이 부산하다.

직원들은 "올 것이 왔다" 며 착잡한 표정들이다.

타공장에 비해 채산이 떨어져 언젠가는 무슨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탓이다.

노조도 2만1천명이나 자른다는 회사계획에 별 저항 없이 따르는 분위기다.

함께 죽는 것보다 감원을 통해서라도 회사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닛산의 '실험' 은 이제 개별회사 차원을 넘어 일본 구조조정의 상징이 돼버렸다.

자동차평론가 도쿠다이지 아리쓰네(德大寺有恒)는 "르노에 의한 닛산 구조조정은 자동차업계뿐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 이라고 말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대기업의 감원은 만명 단위다.

NTT가 2만명, NEC가 1만5천명, 미쓰비시자동차가 1만명…, 대개 이런 식이다.

종신고용.연공서열제는 무너진 지 오래다.

젊은이들의 의식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안정된 직장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다.

정년은 40세, 그후엔 사장 아니면 프로밖에 길이 없다는 생각들이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재팬의 시라야 게이코(白矢桂子)인사계장은 "종전에는 일 위주의 회사형 인간이 주류였으나 요즘은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독립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개인적으로 나서다 보니 자연히 벤처기업이 붐을 이룬다.

그것도 큰 자본이 필요없는 인터넷이나 소프트웨어가 달아오르고 있다.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벤처들이 쏟아져 나오자 이를 한데 묶어 국제적인 산업세력으로 만들어 보자는 대담한 발상도 나왔다.

소프트방크가 구상 중인 '한자문명권 콘텐츠동맹' 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정보통신기술이 아무리 앞섰다 해도 한자 사용국들이 뭉쳐 벌이는 콘텐츠산업을 따라올 수는 없다는 전략적 판단이다.

금융쪽에서도 새 바람이 불고 있다.

부실에 시달리던 대형은행들은 합병을 통해 판을 다시 짜고 있다.

스미토모 계열의 스미토모은행과 미쓰이 계열의 사쿠라은행이, 다이이치간교.후지.니혼고교은행이 각각 합병을 선언했다.

종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구도다.

이는 산업계의 빅뱅으로 직결될 전망이다.

메인뱅크의 변화에 따라 기업들도 합종연횡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 과정에서 깨지는 기업이 나오는가 하면 더 커지는 기업도 나올 것이다.

한마디로 창조적 파괴다.

금융재정사정연구회의 아베 시게루(阿部茂)조사연구부장은 "금융계의 재편이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워낙 광범위해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 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금융계에선 정보통신기술도 광범하게 활용되고 있다.

값싼 중개료를 무기로 소형 인터넷 증권사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고 인터넷 뱅킹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미국의 은행들도 일본의 인터넷 뱅킹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얼마전 시티뱅크의 경영진이 도쿄를 찾아 인터넷 뱅킹의 진척상황을 점검하고 돌아갔을 정도.

그렇다고 일본 경제가 제조업에서 정보통신이나 소프트웨어, 금융으로 온통 무게중심을 옮긴다고 보면 큰 오산이다.

그럴 일본이 아니다.

전산업의 부가가치 중 4분의1은 여전히 제조업에서 나온다.

그 전통적인 제조업의 실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안간힘이다.

소프트와 하드의 양수겸장을 노린다는 것이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부터 직접 제조업체 대표들로 구성된 산업경쟁력 강화회의를 설치해 현장의 목소리를 챙기고 있다.

오부치 총리는 또 제조업의 경쟁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이달 중순부터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에 나서라고 정부에 지시했다.

이를 산업정책에 그대로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2002년 4월에는 사이타마(埼玉)에 제조기술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국립대학을 세우기로 했다.

이름도 물건을 만든다는 뜻의 '모노즈쿠리(物作り)대학' 으로 지었다.

복지와 생활환경을 중시하는 정책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고령화에 대비한 복지시스템을 정비하고 쾌적한 주거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끝에서 끝까지 걸어다닐 만한 사이즈의 소형도시를 시범적으로 건설할 계획이다.

종전처럼 주택단지.공단 등 단지중심의 개발이 아니라 주택.기업.상가.학교.공원 등이 하나의 복합공간에 어우러져 주민들이 훨씬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경제대국에서 생활대국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셈이다.

이 계획을 발표한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경제기획청 장관은 "일본의 첨단기술과 지식을 총집약해 21세기 초 일본 사회에 가장 적합한 삶의 공간을 마련하겠다" 고 밝혔다.

일본은 누가 뭐라 해도 거인이다.

한발짝 떼는 것이 굼떠 보이지만 보폭은 세계를 흔들 정도로 크다.

그 일본이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선진국 중의 선진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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