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욱의 신작기행] '개구리' '멋진 한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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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두 소설이 앞에 놓여있다.

하나는 '불을 찾아서' , 하나는 '밥을 찾아서' 의 기록이다.

전자가 김영현의 '개구리' (창작과비평 겨울호)라면 후자는 공선옥의 '멋진 한세상□' (문학동네 겨울호)이다.

양각되어 있는 이미지는 '불' 과 '밥' 이지만 이 소설들은 기실 '자기' 에 대한 이야기로 음각되어 있다.

'멋진 한세상' 은 자전소설이라는 간판 달고 있기에 그것이 자명해 보이지만, 그런 간판이 없는 '개구리' 역시 두 화자(나와 나의 친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결국 자기를 대상으로 삼는다.

자기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 다시 말해 '나' 에 대해 진술한다는게 쉬운 듯보이지만 사실 가장 어렵다.

우선 관찰, 서술하는 나와 관찰당하는 나를 예리한 면도날로 정밀하게 절단해내는 의도적 분열을 감행해야 하며, 동시에 '보는 나' 는 '보이는 나' 에 대해 엄정삼엄한 시선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수월한 일인가.

세상의 많고 많은 자전의 기록들 혹은 말류의 '사소설' 이 계면쩍은 나르시시즘이나 과한 낭만 또는 허무의 포즈에 투항하는 연유도 바로 그 분열의 미학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환란의 70~80년대, '개구리' 의 두 화자인 '나' 가 찾으려 했던 '불' 은 이념으로, 마르크스로 나아가 해방으로 환원되는 이미지다.

그 불을 찾기 위해 수 많은 '나' 들이 지불해야했던 것은 위장취업.고문.징역 등의 고통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방의 불을 인류에게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 비기는 것이기에 마땅히 받아야 할 쓴잔이라 여겼다.

그리고 난 후, 예의 마르크스는 다른 이도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교살당했다고 보는 것이 '나' 에 대한 '나' 의 중간 결산이다.

'멋진 한세상' 의 '나' 의 사연은 그와 아예 다르다.

'나' 가 80년 5월 광주 시민군에 합류한 것은 배고픔 때문이었다.

"순전히 밥 얻어먹으려구. ..밥만 얻어 먹은 게 아니라. ..음료수며 빵까지 '배 터지게' 먹" 고 나니 5월 광주는 "정말 기분 째지는 5월" 이었다.

이념의 갈급함과 육신의 주림이 자연스럽게 불과 밥을 구하지만 그 이유와 과정은 이다지 다른 것이다.

농조로 말한다면 70~80년대에 '상부구조적 인물' 과 '하부구조적 인물' 은 이렇게 다른 입구로 길을 찾아 들어 왔다가 이 세기의 말에 어느듯 유사한 문학적 경향의 교두보에 서 있다.

그런데 같은가보다 하니, 또 다르다.

'개구리' 의 '나' 는 단절된 행로를 다시금 이어 나가기로 작정한다.

이성과 이념의 복구를 향해 소설의 말미에 희망과 낙관의 기미를 부양시키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이념의 좌절과 회복의 사이클은 일견 간명해 보인다.

가난, 휴학, 버스차장 지원 등으로 지난 생을 메꿔온 '멋진 한세상' 의 '나' 에게도 여전히 '밥 을 찾아서' 가 문제이고 또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말미는 '개구리' 와 퍽 다르다.

희망의 기척은 애써 잘라낸다.

그런데도 읽는 이에게는 오히려 듬직한 느낌을 준다.

불을 찾는 '나' 와 밥을 찾는 '나' 중 누가 더 힘이 셀까□ 현실을 견디고 버티는 힘을 생각컨대!

이성욱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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