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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 실세의 한국, 막전(幕前) 실세의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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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최근 남북 간에 협상 기류가 고조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이 또다시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그가 베이징에서 북한 측 고위 인사와 만나 남북 문제를 논의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이 의원은 “북한 사람 얼굴도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이미지 영역은 국내 정치판의 막후 실세에서 남북 문제의 막후 실세로까지 확대됐다. 막후 실세 문화의 씁쓸한 후유증이다. 어느 나라나 뒤편에 서서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없을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선 꽉 막힌 상황을 뚫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정 현안이 그런 방식으로 해결되고, 소수의 사람들이 전문성을 우선해야 할 현안에까지 관여하는 상황이라면 필요악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미국은 ‘막전(幕前) 실세’의 나라다. 담백하게 지금 맡고 있는 자리가 그 사람의 세(勢)와 일치한다. 북한 문제를 예로 든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대북 협상을 책임진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의중이 중요하다. 한반도 지역을 관장하는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언행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 그리고 권한을 오바마 대통령 측근 인사들에게 넘기는 일이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간담회장에서 지난해 미국 대선 당시 오바마 선거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A씨의 유화적 대북 시각이 화제가 됐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미 정부당국 한반도 담당자 B씨에게 언젠가 자신의 상관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견해에 대해 묻자 “나중이야 몰라도 지금은 내 의견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지금 대북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실세는 자신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정치적 타협이 중요한 미 의회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오바마가 정치적 생명을 건 건강보험 개혁법안의 상원 통과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세금 문제를 관장하는 재무위 소속 의원들이지 오바마를 수시로 만나는 일리노이주의 리처드 더빈 의원이 아니다. 예산안을 주무르는 데 가장 영향력이 센 사람 역시 그 역할을 맡은 하원의 찰스 랭글 세입위원장이다. 오바마의 오랜 동지이자 백악관 선임고문인 데이비드 액설로드와 밸러리 재럿은 18일 나란히 언론에 등장해 아프가니스탄 전쟁, 건강보험 등과 관련한 오바마의 고민과 의중을 전했다. 자리의 성격상 막후 실세로 불릴 만한 그들 역시 장막 앞으로 나와 일하고 싶었던 것일까.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