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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산부인과 방영 400회 계기로 본 시트콤의 성공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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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SBS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 가 지난 15일 방영 4백회를 맞았다. 국내에서 시트콤이 첫선을 보인 건 93년 '오박사네 사람들' . 이후 적지 않은 프로그램들이 등장했지만 별볼일 없이 사라져갔다.

'순풍 산부인과' 는 그나마 실전에서 얻은 '교훈' 을 제대로 활용해 자리를 잡은 경우. 하지만 국내 시트콤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게 사실이다.

방송사 입장에서 보면 시트콤은 그야말로 매력 덩어리다. 무엇보다 적은 제작비로 높은 시청률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트콤의 이같은 저비용 고효율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뚫고 나갈 비상구이기도 하다.

또 재방영이 손쉽다는 점에서도 케이블과 위성방송에 대비해 적합한 콘텐츠 성격을 갖추고 있다.

미국에선 공중파에서 초연된 시트콤이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앵콜 방송 되는 게 방송 관행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1~2년 전부터 국내 방송사마다 시트콤을 내걸었던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제작비를 줄여야 하는 IMF상황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프로그램들의 현실은 어떤가. 대부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바로 시트콤의 성공 요인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서 시트콤이란 장르가 얼마나 치밀한 계산이 전제돼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게 급선무로 떠오르고 있다.

시트콤의 성공 조건을 분석해본다.

◇ 계산된 웃음〓시트콤에서 즉흥적인 연기는 빼놓을 수 없는 양념. MBC '남자셋 여자셋' 에서 신동엽.이의정이 보여준 순발력은 그래서 극의 재미를 더했다. 하지만 이 것이 '결정타' 가 되진 못한다. 시트콤에서 승부를 가르는 포인트는 치밀한 구성과 정교한 대본에 의한 계산된 웃음이다. 30분물에 불과한 에피소드라 할지라도 미스터리 영화에 버금가는 복선과 반전이 깔려있어야 한다.

미국의 인기 시트콤인 '사인펠드(Seinfeld)' 의 한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친구 일레인의 목을 치료한 댓가로 자전거를 선물받은 크레이머. 하지만 목이 다시 아프기 시작하자 자전거를 돌려달라는 시비가 붙는다. 판결을 부탁받은 뉴먼은 "자전거를 둘로 자르라" 고 말한다. 이 얘길 들은 크레이머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전거를 일레인에게 주라고 하자 뉴먼은 "자전거의 주인은 크레이머" 라고 결론짓는다. '솔로몬 왕의 지혜' 를 아이디어로 활용해 구성의 완성도를 높인 대목이다.

◇ 절제의 미학〓웃음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문제는 웃음 뒤에 여운이 남는가의 문제다. 시청자의 감성에만 매달리지 말고 지성에 호소하는 웃음이 있어야 한다. 미국 ABC 방송사의 시트콤 '스핀 시티(Spin City)' 의 한 대목이다. 주지사 사무실의 회계담당인 니키는 주지사를 짝사랑한다. 그런데 어느날 주지사는 니키 앞에서 슈퍼모델과 키스를 나눈다.

슬퍼하는 니키에게 주지사가 "무슨 일 있어□" 하고 묻자 그녀가 던지는 말. "주지사님, 무언가 손에 들어 왔다고 생각했으나 가질 수 없는 그런 심정을 이해하시겠어요?" . 한번 비틀은 대사다.

그래서 '맛' 이 달라진다. 웃음의 격이 바뀐단 얘기다. 물론 한국인의 언어와 감성에 맞는 대사와 표현 방식을 찾는 게 제작진의 몫이다. 이는 또 맛깔스런 대사로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국내 시트콤은 즉자적인 웃음을 겨냥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 친근한 소재〓시트콤은 비록 '외제 그릇' 이지만 안에는 철저한 '신토불이' 가 담겨야 한다. 언어가 다르듯이 유머의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SBS '순풍 산부인과' 가 성공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로 시트콤 소재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누구나 겪는 자잘한 소재를 부풀려야 한단 얘기다.

'순풍…' 에서 방귀 등을 소재로 택했던 게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이를 위해선 방귀와 관련된 많은 양의 사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 작가의 상상력으로 소재를 증폭시키면 된다.

◇ 섬세한 심리묘사〓친근한 소재와 함께 동반돼야 하는 게 섬세한 심리묘사다. 이것은 국내 시트콤이 특히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미팅을 소재로 택했다고 하자. 지금까진 대부분 미팅에 참석한 인물 간에 벌어지는 해프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런 방식은 드라마에 가깝지 시트콤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미팅에 참석한 인물들의 다양한 심리적 반응에 접근한 후 각 인물의 성격에 대입시키면 된다. 시청자들 모두가 생활 속에서 느끼고 있었지만 꼭 짚지 못했던 부분을 반영하면 된다. TV를 보며 '아, 그랬지. 그랬어!' 라는 대답이 나오게 말이다.

시트콤은 여러 상황을 연결시키는 것보다 하나의 압축된 상황을 보다 깊숙히 파고 들어야 하는 장르다. 그것이 등장 인물의 심리묘사와 연결될 때 웃음의 깊이도 배가된다.

◇ 작가층〓물론 수십명의 작가가 포진해 있는 외국에 비하면 대여섯명으로, 그것도 주 5일 방영하는 국내 작가 시스템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국내에서 시트콤이 일일극처럼 방영되며 작가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후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위해 채널을 선점해 고정시켜 놓겠다는 방송사측의 전략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방송사에서 시트콤을 전략 상품으로 키우기 위해선 먼저 작가 시스템에 대한 기본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다. 머지않은 미래에 국내에도 시간대가 아닌 프로그램별로 광고 수입이 달라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MBC에서 주 1회 방영할 시트콤(신동엽.이의정 출연 예정)을 기획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대응이다. ' 미국에서 PD 특파원으로 활동하다 최근 복귀해 MBC '점프' 를 맡고 있는 최영근 책임프로듀서의 시트콤에 대한 정의는 의미심장하다.

"시트콤은 TV 프로그램이라기 보다 시청자들의 친구이자 정다운 이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화병 속에 담긴 꽃이 아니라 담장 옆에 피어있는 들꽃이어야 한단 말이다. "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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