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 수기 독점연재] 19.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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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면회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다 나날이 야위어가는 희로의 모습을 떠올리니 눈물만 났단다. 홍조를 띤 너의 얼굴색이 어느새 누렇게 변했더구나. 희로야, 이 엄마는 너만 생각하면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되고 가슴이 막혀…. 지금처럼 편지를 쓸 때도 눈물이 나와 늘 생각하고 있던 것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단다. 희로야, 엄마는 네 인생이 걱정이다. 지금까지는 젊어서 어떻게 되겠지 생각했지만 복역이 끝난 후엔 어떻게 될는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의 네 건강이 걱정된다. 우리 둘 다 병들지 말고 10년만 버텨보자꾸나. 져서는 안돼. " (75년 12월 31일)

"어머니, 10년만 버텨보자던 당신은 벌써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이 불효자식만 혼자 남았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이승을 떠나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마모토(熊本)형무소 담장 밖을 배회하고 계실 때 저는 이 세상에 남아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따라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만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뜻이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의 유골을 안고 고국 땅을 밟는 순간, 어떤게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인가 하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

수형생활 동안 내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어머니의 면회와 편지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달 한 번씩 빠짐없이 1천1백㎞나 떨어져 있는 시즈오카(靜岡)와 구마모토 사이를 오가며 면회오시던 어머니가 85년께 중풍으로 쓰러져 발길을 끊으신 후 나는 한동안 실의에 빠진 나날들을 보냈다.

어머니는 면회를 위해 오전 5시에 가케가와(掛川:시즈오카현의 소도시)역을 출발해 하마마쓰(浜松)역까지 간다. 그 곳에서 신칸센(新幹線:일본의 고속열차)을 갈아타고 나고야(名古屋)역에 도착하면 다시 초특급 '히카리' 를 갈아탄다.

하카다(博多:일본 남부 후쿠오카현의 도시)역에 도착하면 이번에는 관절염으로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긴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구마모토로 가는 가고시마(鹿兒島)온천행 열차를 탈 수 없기 때문이다. 구마모토역에 내려 택시로 30분 정도 달려 형무소에 도착하면 오후 3시쯤. 그토록 어렵게 구마모토까지 내려와 30분 밖에 안되는 아들과의 면회를 마치면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재촉해야 했다. 돌아갈 때엔 오후 6시에 출발하는 가고시마발 오사카(大阪)행 특급 침대열차 '블루트레인' 을 탔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침대차에서 밤을 꼬박 보내면 늙은 어머니의 몸은 파김치가 된다. 새벽에 오사카에 도착한 어머니는 다시 신칸센을 타고 하마마쓰를 거쳐 가케가와로 되돌아 온다.

어머니는 면회를 오시기 전후에 꼭 편지를 보냈다. 글자를 모르는 당신은 족발집 '긴토키(金時)' 에 찾아오는 단골손님들께 머리를 숙여가며 대필을 부탁해 편지를 썼다. 가슴 속에는 할 말이 많은데 남의 손을 빌려 표현했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컸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어머니의 편지를 대신 써주신 고마운 동네 일본분들께 인사도 못드리고 불쑥 떠나온 이 무심한 인간의 죄를 어떻게 빌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지극한 모성애에는 일본인 간수들도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머니" 라며 탄복했다. 다카무라(高村)전 구마모토 형무소장은 어머니가 면회오면 꼭 소장실로 모시고 가 차를 대접했으며, 부하 직원들에게 역까지 배웅하게 했다.

내가 옥중결혼한 D와 한글편지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정성에 감동한 다카무라 소장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보내주신 1천통에 달하는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늘 밤, 이웃 사람들과 너가 태어났을 때 이야기를 했단다. 나는 19세 때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혼자서 너를 낳았다. 희로가 내 배 속에서 나왔을 땐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얼굴이 새파란 상태였다.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네 아버지가 '이럴 땐 집 안에 연기를 들여보내면 된다' 며 지붕으로 올라가 굴뚝 연기를 방안으로 넣어주셨다. 그리고 나는 너의 코에 입을 대고 훅훅 공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희로가 건강한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 (75년 12월 7일)

"올해도 추운 날이 이어지고 있구나. 이 엄마는 추운 곳에서 고생하는 희로를 생각하며 밤에 모포와 이불 한 장만 덮고 잔단다. 빨리 구마모토로 달려가고 싶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기차가 못 갈지 모른다는구나. 어쩌면 2월 중에는 면회를 못 갈지도 모르겠다. 엄마도 이젠 늙어 집에서 가게까지 왔다갔다 하는 게 힘이 든다. 그래서 가게 부근에 집을 찾고 있단다. 네 형제들은 엄마가 너를 면회하고 돌아와도 누구하나 걱정하는 놈이 없구나. 그런 녀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내 마음이 이렇게 쓸쓸하지 않을텐데. " (77년 2월 5일)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지만 어머니는 이 불효자식 만을 진정한 자식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잘 살고 있는 백만명의 중생보다 한 명의 불쌍한 중생을 먼저 생각한다는 부처님의 마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는 나의 신앙이었고, 등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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