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천하 대세의 요소, 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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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강전] ○황이중 7단 ●허영호 7단

제3보(24~34)=감각이 살아서 예민하게 작동하는 날이 있고 굳은 듯 멍한 날이 있다. 프로 기사도 마찬가지다. 감각이 살아 움직이는 날은 대세가 보이고 상상력은 날개를 단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손은 관성과 상식을 따라 움직이고 만다. 26까지 좌상을 선수로 파내며 허영호 7단은 ‘편해졌다’고 느낀다. 하지만 27로 가는 손길은 긴장감이 넘친다. 올해는 컨디션도 좋고 운도 따라준다. 수년간 세계대회서 영 힘을 쓰지 못한 아픔을 이번에는 꼭 씻고 싶다. 때마침 바둑은 잘 풀리고 있다.

황이중 7단은 묵묵히 28로 갈라치고 29에 30으로 벌려 둔다. 상대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기사. 조금 당했지만 차분히 두면 기회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31로 받았을 때도 그는 무심히 32로 달렸다. 정석 수순이기에 관성처럼 손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때 저 쪽에서 33이 쿵 하고 떨어졌다. 황이중의 가슴도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상대를 경시한 것일까’. 황이중은 깊은 후회에 휩싸이고 만다. 32는 당연히 ‘참고도’ 백 1로 가야 했다. 이곳이야말로 쌍방 영역 쟁탈의 분기점이 되는 천하의 요소였다. 언젠가 준동할지도 모를 흑▲들도 이 수로 인해 숨을 죽인다. 뒤늦게 34로 삭감해 가는 황이중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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