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약속파기- 미국과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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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90년대 초 특파원으로 워싱턴에 머물 당시 미국에서는 의원들의 중임제한운동 (Term - Limits Movement) 이 활발하게 벌어졌었다.

한번 상.하원 의원에 당선되면 그 기득권을 이용, 재당선을 거듭해 평생 의원직을 누리게 되고 자연히 정치귀족화해 유권자와는 멀어져가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운동이었다.

선거직의 경우 최대한 두, 세번의 임기만 봉사하다가 물러가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이 운동은 92년 선거에서 큰 바람을 일으켰다.

이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사람만 4백35명의 하원의원 가운데 58명이었다.

당시 하원의장인 토머스 폴리 의원도 중임 제한을 공약한 한 신인에게 패배해 30년 의원생활을 마감하고 지금은 주일대사로 일하고 있다.

이번에 다시 워싱턴에 와보니 이 의원들이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58명 가운데 약속기한이 2000년으로 끝나는 사람은 10명이었다.

이들은 당시 세번만 연임 (하원 임기는 2년)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당선됐기 때문에 약속한 대로라면 내년선거에는 출마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정치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다시 출마할 수 있을까 고심 중이었다.

이들은 "내년 불출마 약속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들의 다시 출마하라는 전화가 불똥이 튄다" 면서 "내가 물러나고 또다시 의회 경험이 없는 초선의원이 나온다면 지역구 주민들만 손해를 본다" 는 논리를 펴고 있다.

자신이 신인으로 출마할 때는 다선의원을 비난하고 이제와선 다선의원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니 참으로 뻔뻔한 논리다.

정치인들이 국민과의 약속을 자기 편리하게 바꾸기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문제는 이러한 약속파기 움직임에 대한 미 국민의 반응이다.

뉴욕타임스는 "중임 제한 제도는 위헌요소 등이 있어 반대하지만 중임 제한을 공약해 당선되고 나서 이를 깨고 다시 출마하는 의원들에게는 표로 응징하자" 고 나섰다.

중임 제한 운동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의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찾아 다니며 낙선운동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유권자들도 이들의 약속파기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어 누구도 선뜻 재출마를 발표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

미 국민은 정치인 개인거취에 대한 이러한 약속 뿐 아니라 일반공약의 불이행에 대해서도 엄격하다.

부시 대통령은 88년 대선에서 "내 말을 지켜보라 - 더 이상 새 세금은 없다 (Read my lips - No new taxes)" 는 공약을 걸고 당선됐으나 이를 지키지 못했다.

다음 선거에서 클린턴 후보는 부시의 이 구호를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선거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정직성.신뢰성은 미 국민이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덕목이다.

"당신은 거짓말쟁이 (You are liar)" 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이고 정치인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장이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나는 결코 악당이 아니다 (I am not a crook)" 라며 자신과 무관함을 주장했지만 결국 거짓말로 드러나 사임했다.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 (盜聽) 장치를 시도한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거짓말로 이를 은폐한 것이 더 큰 문제로 부각됐다.

카터 후보는 닉슨의 이러한 거짓말에 혐오를 느낀 국민을 향해 "나는 결코 거짓말을 안하겠다 (I' ll never lie to you)" 는 단 한마디 구호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클린턴 대통령 역시 백악관에서 섹스행위를 한 자체보다 거짓말이 치명적이었다.

"나는 그 여인 (르윈스키) 과 결코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고 말했다가 거짓말로 드러나 결국 탄핵표결까지 치르는 곤욕을 치렀다.

내각제 약속이 파기됐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과 총리가 국민과 한 약속을 깬 것이다.

아니, 단순히 약속을 깬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안 될 줄 서로 뻔히 알면서 득표용으로 이를 내세웠으니 사실은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어제 국회표결을 보라. 참으로 뻔뻔하다.

국민과 언론도 너무 관대하다.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은 으레 그런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눈길을 돌린다.

오히려 거짓말을 밥 먹듯 해서라도 내 지역사람이 정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대통령과 총리가 이런 식인 나라에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약속을 어기고도 당당한 나라, 적당한 거짓말이 출세의 첩경인 나라, 그런 나라에 장래가 있을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문창극 美洲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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