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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385.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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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8장 도둑

하동에서 구례까지는 서둘러 가면 30분이면 당도할 수 있는 섬진강의 오른편 강변길이었다. 상설시장은 시내 안에 있지만, 장터는 남원과 화엄사 방향으로 뚫려 있는 외곽도로 사이에 있었다.

낡았지만 많은 장옥들이 늘어서 있고, 좌판을 펼 장소도 널찍해서 노점상들끼리 자리다툼을 벌일 까닭이 없어서 좋았다.

구례는 예부터 약초상들이 전국에서 모여들 만큼 한약재 시장으로 명자를 떨쳤던 고장이었다. 한물 때가 되면 머루.다래.취.버섯.도라지.고사리 같은 산나물이 지천이었고, 산수유와 백지.생지황.당귀 같은 한약재들과 토종꿀들이 한물로, 장시로 쏟아져 나올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낮이 되어도 장꾼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한적하기만 했다. 구례의 토종꿀이 유명한 것은 간전면과 산동면과 토지면에 야생화와 싸리.밤나무.피나무들이 많기 때문인데, 그 마을 사람들은 이맘때면 벌통 관리에 열중하느라, 장터 출입은 엄두도 못냈다.

고로쇠 약수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산의 서쪽 자락이면서 구례읍내에선 서북쪽에 있는 상위. 방광. 심원. 황전. 문수리. 직전. 평도와 읍내에서 동남쪽인 용지동과 중대리는 다른 지방 것보다 손꼽아주는 약수였다. 그 나무는 수액이 잘 나오다가도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면 멎게 되는데, 구례지역은 기온의 일교차가 크면서 바람이 적기 때문에 최고의 약수를 뽑아낼 수 있는 까닭이다.

그 마을 역시 이제 한참 수액을 뽑아내는 시기였기 때문에 장터로 나갈 겨를이 없었다. 신경통이나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부터 마을사람들은 농사보다 그 일에 매달렸다.

경칩철의 고로쇠라면, 곡우철에는 거자수 약수까지 뽑느라, 장터 출입과는 등을 돌리고 사는 편이었다. 게다가 개나리처럼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산수유도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간염과 남성 정력과 당뇨병과 고혈압과 관절염, 그리고 손발이 차거나 식은 땀이나 긴장감 같은 성인병 면역기능을 강화시키는데 특효라는 소문이 나고부터 외지인들과 상인들이 문자 그대로 입도선매로 나무를 통째로 사려고 몰려들기 때문에 대중없이 집을 비우고 장터로 나설 수 없었다.

구례고을 인근 마을이 대개 그런 사정이었기 때문에 장날이 되어도 장꾼들의 모습은 한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태호는 방앗간 고양이처럼 구멍만 지키고 있을 것이 아니라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게 묘책이었다.

서울에서 지리산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대개 구례로 찾아와 바로 코앞인 화엄사 (華嚴寺) 를 둘러보고 지리산으로 오르든지, 아니면 돌아가는 길이라도 필경 화엄사를 빼놓지 않는다.

화엄사는 지리산의 산세를 누를 수 있을 만큼 그 위용이 당당하고 엄숙한 사찰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호가 고민 끝에 선택한 장사 길목은 화엄사 들머리는 아니었다. 그는 구례읍에서 남원길인 19번 도로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뚫려 있는 지방도에 있는 천은사와 지리산 온천이 자리한 길목을 선택했다.

그 길을 곧장 오르면, 바로 우리나라 산수유의 주산지인 산동면 산동마을에 닿고, 산동마을은 또 고로쇠의 산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외지 관광객들이 흔전으로 몰려들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에는 철규와 승희도 거의 손을 놓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시내에 있는 상설시장 근처에 빌붙어 자리를 잡아보려고 기웃거려 보았지만, 시내의 도로가 하동처럼 좁은데다가 대형 할인점까지 들어서 있어서 엄두조차 못내고 말았다.

나름대로 분석한 태호의 말을 듣고 철규도 어쩔 수 없이 행중을 두 패로 나누기로 했다. 숙소는 화개골에 두겠지만, 태호는 형식과 패가 됐고, 철규는 승희와 짝이 되기로 합의가 됐다.

일찍 좌판을 거둔 그들은 곧장 동서로 헤어졌다. 오징어 장수인 태호는 천은사 쪽으로 갈 것이었고, 간고등어 장수인 철규는 남원으로 가서 하룻밤 쉴 민박집을 찾아야 했다.

남원장을 본 뒤로는 다시 천은사에서 좌판을 벌인 태호를 찾아가거나 화개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일찍 좌판을 거둔 탓으로 남원 도착도 해지기 전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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