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진리가 권력자에 전달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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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부조직 개편은 진리가 권력자에게 잘 전달되게끔 관리체제를 개선하는데 치중해야 할 것이다.

외환위기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던 국가관리체제에서 우리는 이 교훈을 뼈아프게 체험했다.

이제부터 정부도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정부는 세계적 표준에 따라 기구개편을 권력게임보다도 진실에 근거한 합리성에 입각해 단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환란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관리체제 결함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단기적으로는 유동성 부족과 장기적으로는 고비용.저효율 구조와 재벌 및 은행들의 과다한 차입경영이 초래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도외시해서 안될 것은 외환수급에 관한 진실이 권력자들에게 적시에 알려지지 않았던 관리체제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유수한 학자와 수많은 연구소 중에서 환란 가능성을 사전에 예측한 사람은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듣건대 클린턴 미대통령이 한국 외환보유액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뒤에야 국제통화기금 (IMF)에 긴급금융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니 이것은 분명히 국가관리의 실패에 해당한다.

그 책임은 몇분의 개개인보다도 경제를 관리하는 체제의 결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을까. 기본적으로 그것은 권력이 진리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여야간의 당쟁과 대선을 향한 권력투쟁이 한창 가열되고 있었을 때 정치지도자들은 국가가 부도 직전에 있었던 경제현실을 외면했다.

관료들도 이에 대한 진실을 권력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극소수 인사들이 정확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무시당했다고 하니 이것은 나쁜 소식을 가져온 사신을 죽여버렸다는 고사를 연상시킨다.

권력자들은 보통 나쁜 소식을 듣기 싫어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지도자들은 정치논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의 세계화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국내 구조조정을 경시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은 94년부터 '세계화' 를 국정지표로 내세웠고 그 다음해에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한국을 가입시켰으며 국내금융시장을 개방했다.

그러나 그는 세계화가 초래하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재벌.금융 및 노동개혁은 여야대결과 당사자들의 저항으로 인해 완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급히 요청된 개혁은 IMF체제하에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비로소 착수.추진되고 있다.

구조조정의 목표는 자본과 노동의 생산성을 높여 국가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곧 정부의 경쟁력을 제고시키는 일이다.

이제부터 공공부문, 즉 정부 조직들도 생산성.투명성 및 책임성을 실천에 옮겨 세계적 표준들을 따를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

정부조직 개편도 이러한 관점에서 권력보다 진리에 근거해 실시돼야 할 것이다.

원래 정부가 이에 필요한 경영진단을 민간조직에 의뢰한 것도 이러한 취지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영진단의 본래 정신이 일부 보도와 같이 정파와 부처들간의 정쟁으로 좌절된다면 또 다시 진리는 권력에 의해 무시되고 말 것이다.

물론 긴 안목에서 본다면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바와 같이 지식이 힘이 될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니체가 역설한 것처럼 힘이 곧 진리가 된다.

현실정치에서는 권력이 진리를 지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각책임제를 위한 개헌여부와 내년에 있을 총선을 앞두고 첨예한 대결을 하고 있는 현 정국에서 정부조직 개편도 정쟁화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조직개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직접 이해당사자가 아닌 전문가들이나 시민단체들의 객관적 의견을 더욱 존중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부조직 개편도 궁극적으로는 국민 동의에 기초해야 하므로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이 결과 확보되는 정당성과 함께 정부는 효율성도 겸비해야 한다.

실제로 세계화 경제에서 정부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문제해결 능력을 과시해 탁월한 업적 정당성을 유지해야 한다.

경제문제 해결에 뚜렷한 업적을 기록한 정부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현대조직이론은 정부의 관리체제가 정책내용을 결정한다고 지적한다.

의사결정의 메커니즘에 따라 정책 내용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기구의 통폐합도 단순히 작은 정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진실이 정책 결정에 효과적으로 투입되고 그 이행평가가 정책과정에 잘 환류되게끔 운영절차를 개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힘을 가진 자가 실사구시 (實事求是)에 입각해 진리를 경청할 때 가능하다.

안병준 연세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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