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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기 전 우리은행장, “투자 결정 과정에서 법 위반” 문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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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해 금융위기로 불거진 우리은행의 거액 손실에 대한 책임이 전직 행장이던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에게 돌아가게 됐다. 황 회장이 우리은행장 시절(2004년 3월~2007년 3월), 투자를 잘못해 거액의 손실을 입혔다는 게 이 은행의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와 금융감독원의 판단이다. 그러나 황 회장은 결과만으로 경영적 판단을 제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우리은행은 2004년 6월부터 2007년 7월까지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에 15억8000만 달러를 투자했다가 90%를 손실로 떠안았다. 우리 돈으로 1조6280억원이었다. 국내 금융회사가 금융상품에 투자해 입은 손실로는 가장 큰 규모다.

민간은행이 이런 손실을 냈다면 경영진 퇴진으로 끝나지만, 공적자금이 들어간 우리은행의 경우 주주인 예보가 그 책임 소재를 따져 문책하도록 돼 있다. 또 금감원은 경영진이 위법을 저질렀을 때 제재를 한다.

금감원과 예보가 황 회장을 징계하려는 것은 지난해 나온 손실의 책임이 현 경영진이 아니라 전임자인 황 회장에게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특히 그 과정에서 황 회장이 위법 행위를 했다고 보고 있다. 금감원과 예보는 손실액 중 1조1800억원은 황 회장에게, 나머지는 황 회장의 후임인 박해춘 전 행장(현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에게 책임이 있는 것으로 분류했다.

◆책임 공방 여전=황 회장은 금감원에 제출한 1000쪽에 달하는 소명자료를 통해 파생상품 투자는 실무진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적법한 절차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우량자산에 투자했는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금융위기 때문에 손실이 발생한 만큼 결과적으로 손실이 났다는 이유로 징계하는 건 경영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우리은행에 대해서도 자신의 퇴임 후에 일부 손해를 보고서라도 CDO를 팔 기회가 있었는데도 팔지 못한 것은 사후관리 미흡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금감원 관계자는 “우리은행에 대한 종합검사에서 황 회장에게 책임을 물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또 금융위 관계자는 “예보와 달리 금감원은 단순히 투자 손실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 징계를 결정할 수 없다”며 “우리은행의 투자결정 과정에서 은행법을 위반한 사실이 적발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산 대비 파생상품 투자비율은 우리은행과 농협이 비슷한데도 정용근 전 농협 신용부문 대표에겐 낮은 단계의 징계가 논의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같은 사안으로 행장 퇴임 후인 2008년 4월 예보로부터 ‘경고’에 해당하는 징계 조치를 이미 받았다. 또 같은 해 5~6월 금감원은 우리은행을 종합 검사했지만 파생상품 투자에 대해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황 회장은 같은 사안으로 다시 징계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금감원과 예보는 “손실이 세 배 이상 불어났으니 검사의 관점과 강도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향후 절차는=금감원 제재심의위 결과는 검사의 구형과 유사하다. 금감원과 금융위는 합동간담회에서 의견을 조율해 9일 또는 23일 열리는 금융위원회 회의에서 제재 수위를 최종 결정한다. 이와 별도로 이달 23일이나 다음 달 7일 정기 예보위원회를 열어 제재를 논의한다.

이를 통해 ‘직무정지’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황 회장이 현직인 KB금융지주 회장직을 물러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4년간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선임될 수 없으므로, 연임이나 금융계 내부 전직이 불가능하다. 황 회장은 금융위의 징계 결정 이후 재심 청구나 행정소송을 검토하고 있다.

황 회장의 징계에 대해선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경영판단 자체를 당국이 문책할 수는 없다, 손실을 냈으면 책임져야 한다, 하며 양쪽으로 의견이 나뉘는 상황이다. 고려대 김동원(경영학) 교수는 “절차상의 중대한 과실이나 고의가 없었다면 경영자의 판단은 최대한 존중돼야 한다”며 “사후적 손실에만 매달릴 경우 경영자가 중대 결정을 하는 데 상당한 장애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서울 소재 대학의 교수(경제학)는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이익도 나고 손실이 날 수 있지만 우리은행의 경우 손실 규모가 너무 컸다”며 “해외 금융회사의 책임자들처럼 황 회장도 사임에 버금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현·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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