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한글문화의 내일을 위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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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재중동포들은 법적으로 중국인이지만 중국에 살면서도 북경을 북경이라 부르지 베이징이라 부르지 않는다.

연변은 그냥 연변이지 옌볜이 아니다.

그러나 국내 교과서와 다수의 신문.방송은 수천년에 걸쳐 정착된 우리 한자음 대신 굳이 베이징.옌볜이라고 '현지음' 을 고집한다.

정부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름의 경우 신해혁명 이전인 삼국지의 제갈량은 제갈량이지만 현대인물인 모택동은 마오쩌둥이 된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그런 중국동포들을 중국인들이 쓰는 호칭인 조선족으로 별 생각 없이 부르기도 한다.

재미동포.재일동포는 코리안이나 조센징이 아닌데 재중동포는 조선족이 되고 재러시아동포는 흔히 고려인이 된다.

연초 갑작스레 제기된 한자병용론이 계기가 돼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국어의 현실과 그 밑바닥에 깔린 의식의 혼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글전용 - 한자병용 - 한자혼용의 논쟁은 해방 이후 몇차례나 거듭돼온 것이어서 그 논거와 주장이 별달리 새로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반세기가 지나도록 불씨가 좀처럼 꺼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다른 많은 분야가 그러하듯 우리 사회는 어문정책에서도 '합의' 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 때문이다.

1948년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공포 이후 정부는 한글전용으로 정책방향을 잡아 왔지만 학교에서의 한자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일관되지도 철저하지도 못했다.

앞에 든 연변 동포사회와 국내의 대비에서 보듯 국내외 한인의 언어생활엔 혼선이 많다.

원칙을 만들고 언어공동체의 구심점이 돼야 할 우리 정부의 어문정책이 한자 지명.인명 표기처럼 오히려 혼란을 유발하거나 부추긴 측면도 없지 않았다.

다른 부문 정책들과의 상호 연관성이 소홀히 된 채 부분적으로 진행된 점도 시비가 이어지는 빌미가 됐다.

어문정책은 단순히 말과 글의 사용, 국어교육에 관한 일반원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과 자기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의 장기적 지향점이나 비전과 직결돼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의 가장 중심적이고 기본이 되는 핵심의제라고 말할 수 있다.

재연된 논쟁 과정에서도 한글로만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한자를 함께 쓰거나 섞어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인식과 지향점의 차이가 보이게 나타나거나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한자가 우리 글자인가 아닌가' '동북아시아 한자문화권이 실체인가 허구인가' 라는 기본전제에서부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족.국가의 목표에까지 생각이 달라 보인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국가의 목표와 정책을 결정할 수 있게 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같은 차원의 논쟁을 반복하는 소모적인 상황은 그러나 이제 끝내야 한다.

논쟁은 돌출로 재연됐지만 이번 기회에 어문정책의 모순을 바로잡고 그 전제가 되는 역사인식의 통일을 끌어낸다면 오히려 21세기로 가는 바람직한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논의를 한자병용문제에 한정하지 말고 넓힐 것을 제안한다.

한자음 표기, 외국어의 한글 표기,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 등 어문정책 전반으로 넓혀 그 차원까지 높여야 한다.

지난해 스페인어 문학인대회에서 스페인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카밀로 호세 셀라는 "21세기에는 영어.스페인어.중국어.아랍어 등 4개 언어만 남고 나머지는 지역적 방언이나 시어 (詩語) 로만 존재할 것" 이라고 극단적인 전망을 했다.

한국어는 세계의 언어 가운데 사용인구에서 15위 정도의 언어다.

우리 어문정책은 세계화와 전자통신혁명이 가져온 '언어통폐합' 시대 한국어 공동체의 생존.발전전략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얼마 전 큰 논란을 불러온 영어공용화 주장까지 포함해 모든 의견과 주장이 개진되고 검증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중대한 논의가 단기간에 결론이 나기는 어렵다.

시간을 두고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입체적인 조사.연구.토론이 전개돼야 한다.

그래서 졸속을 피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정부부처보다 민간연구기관이 주도하고 국어학계만이 아니라 연관되는 각 분야 전문가.시민들까지 국내외에서 참여하는 공개된 마당으로 펼쳐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개념의 특별기구도 검토할 만하다.

이번에만은 꼭 '합의' 를 끌어내자.

문병호 편집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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