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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반쪽청문회' 그냥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미국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1929년 뉴욕 월스트리트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을 전쟁보다 더 심각한 위기였다고 말한다.

당시의 레만투자회사의 사장 알렉산더 삭스는 그건 예사로운 경제공황이 아니라 "경제적인 허무주의의 내습 (來襲)" 이라고 말했다.

미국인 4명중 1명이 실직하고 공업생산은 절반으로 줄었다.

스탈린의 소련에서 6천명의 미국인 숙련노동자를 모집하는데 10만명의 미국인이 응모했다니 그 때의 사정을 알 만하다.

히틀러는 독일보다 미국에서 더 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미국 상원 금융통화위원회는 많은 실직자들이 거리에서 사과를 팔고, 더 많은 실직자들이 무료급식소에서 한 컵의 국물로 허기를 달래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대공황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다.

쉬엄쉬엄 3년 동안 계속된 청문회에서는 모건그룹이 우리의 한보그룹 같은 존재로 도마 위에 올랐다.

모건그룹은 1930년부터 3년 동안 미국에서는 단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한보리스트 같은 모건리스트는 더 놀라웠다.

모건그룹은 정계와 사회의 많은 거물들에게 계열사들의 주식을 시장가격보다 훨씬 싸게 제공해 결과적으로 거액의 뇌물을 상납해 왔다.

리스트에는 전대통령 캘빈 쿨리지, 1차 세계대전의 영웅 존 퍼싱 장군, 전설적인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대법원판사 오웬 로버츠와 함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의 현직 재무장관인 윌리엄 우딘까지 올라 있었다.

당연히 의회와 여론은 루스벨트에게 재무장관의 해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우딘 해임을 거부하면서 말했다.

"그때는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을 저질렀지요. " 정책청문회를 열겠다던 당초의 약속과 달리 전정권의 비리를 캐겠다는 국민회의의 기세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청문회는 성공했다.

청문회의 산물로 증권거래법이 제정돼 주식시장이 증권거래위원회 (SEC) 의 감독을 받게 되고, 저축보험공사 (FDIC)가 출범해 보통사람들의 저축이 보호받는 길이 열렸다.

청문회가 성공한 것은 퍼디난드 페코라라는 컴퓨터 같은 두뇌와 냉철한 이성을 가진 변호사를 위원회의 간사 (전문위원) 로 영입한 결과다.

그는 10명의 의원보다 많은 일을 해냈다.

1689년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전쟁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만든 데서 비롯한 청문회는 역사적인 권리장전 (權利章典) 을 제정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청문회는 본회의 중심의 영국보다는 위원회 중심의 미국에서 의회의 보편적인 활동으로 정착했다.

청문회의 목적은 두가지다.

하나는 의회의 입법이나 조사활동에 관계있는 사람들을 불러 정보를 얻고 여론을 입법에 반영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여러 집단간의 갈등과 이해를 조정해 사회를 안정시키고 통합하는 것이다.

연립여당이 경제청문회를 야당의 참가없이 단독으로 시작한 것은 청문회의 위상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이다.

정책청문회인지 비리청문회인지 개념정리도 안된 청문회가 생산적일 수 있겠는가.

여당의원끼리 둘러앉아 주눅이 들어 있는 증인들을 상대로 내년 총선거를 의식한 정치쇼를 벌이고 한두명의 청문회 스타나 배출하자는 것인가.

미국의 대공황 청문회를 취재한 어느 기자는 폭발직전의 흉흉한 사회분위기 아래 열린 청문회였지만 노회한 증인들을 상대로 질문의 대부분을 담당한 전문위원 페코라가 단 한번도 냉정을 잃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우리 국회는 5공 청문회에서 어느 의원이 증인의 한사람을 악마라고 일갈하던 부끄러운 정치수준을 졸업했는가.

청문회 성공의 조건은 간단하다.

여당이 정치력을 발휘해 야당을 참석시켜야 한다.

야당도 타협해야 한다.

그래야 청문회가 명분과 정당성을 갖는다.

증인들에 대한 인격살인적인 공격은 시간과 국고낭비다.

청문회에서 얻은 정보와 교훈은 미국의 대공황 청문회 같이 중요한 입법으로 연결돼야 한다.

눈앞의 당리당략에 갇힌 청문회가 아니라 2000년대의 타산지석 (他山之石) 을 찾는 청문회가 돼야 한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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