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미용가위 든 의사 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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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 ‘미용사 닥터’ 유덕기씨(左)가 10일 서울 방학동에 있는 자신의 병원 진료실에서 미용 기술을 시연해보이고 있다. 그는 병원 한켠에 마네킹과 가발 등을 비치해놓고 틈나는 대로 연습을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빗과 가위만 있으면 혼자서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미용사 자격증에 도전했습니다."

4전 5기 끝에 최근 미용사 자격증을 따낸 내과의사 유덕기(48)씨. 평소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지만 봉사활동을 할 때는 솜씨 좋은 미용사로 변신한다.

이달 말 그는 미용학원 동료들과 함께 양로원.영아원.복지관 등으로 미용 봉사활동을 떠날 계획이다. 의사라는 본래 직업은 숨긴 채-. 만약 머리 손질을 해주면서 '당신의 건강은 무엇이 문제'라고 일러주는 중년의 남자를 만난다면 그가 유씨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미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해 경기도 강화에서 미용사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한 것이 계기였다.

"의약분업 이후 의료봉사 하기가 힘들어졌어요. 꼭 약사가 함께 가야 처방한 약을 현장에서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에게 처방전을 쥐어주면서 '약은 사 드세요'라고 말해야 하지요. 그게 미안하더라고요. 그런데 미용사들은 빗과 가위만 달랑 들고 와서도 훌륭하게 봉사를 하더군요. 부러웠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나홀로 봉사'가 가능한 미용기술을 직접 배워보기로 했다.

"이.미용사 자격증이 없으면 무료봉사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미용학원에 등록했어요. 매일 저녁 진료가 끝나면 미용학원으로 달려가 밤 늦게까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1년간 오후 10시 이전에 귀가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처음엔 아내와 두 딸에게 비밀로 했지만 미용사 자격시험에 응시하면서 들통이 났습니다. 연거푸 네번을 떨어지자 아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면박을 주더군요."

그는 미용기술을 배우는 것이 "골프보다 재미 있었다"고 했다. 시험준비 기간엔 친구들과 만나지도 않고 중요한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했다."의사가 뭐가 아쉬워서…"라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심지어 젊은 여자들(학원 동료)과 어울려 다닌다는 오해도 받았다.

"필기시험엔 쉽게 합격했지만 실기에서 번번이 고배를 들었어요. 특히 신부 화장이 가장 힘들었죠. 화장을 35분 안에 끝내야 합격하는데 언제 여자 화장을 해봤어야죠. 또 화장을 하려면 모델이 있어야 하는데 아내가 '절대 못 도와주겠다'고 해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 학원 동료들에게 부탁했어요. 시험준비를 위해 사용한 가발만 쇼핑백으로 5개 분량(150만원어치)은 될 겁니다."

5수 끝에 미용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그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제 미용기술에 관한 한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한다. 특히 커트 기술은 '안정적'이라고 자신한다.

유씨는 가톨릭의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뒤 소화기내과 전문의와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방지거병원 내과 과장 등을 역임한 뒤 1989년부터 서울 방학동에서 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봉사활동 현장에서는 '방학동 미용사'로 통한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tkpark@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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