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영 칼럼

자칼, 돈키호테, 베네수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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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9.11 테러가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 정계는 베네수엘라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경제 저격수가 실패했다. 이제 자칼을 보내야 할 때인가?" 존 퍼킨스는 그의 책 '경제 저격수의 고백'(황금가지.2005)에서 이렇게 자문했다. 회유와 협박의 경제 저격이 실패하면 "좀 더 강력한 방법을 사용하는" 진짜 저격수를-자칼을-보내고, 그들마저 실패하면 군대를 보내는 것이 이 방면의 공식이란다. 저자는 사담 후세인 덕에 베네수엘라가 살아났다고 자답한다.

최근 외신은 베네수엘라의 별난 독서 캠페인을 전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불의를 없애고 세계를 고치는 전사의 정신을 북돋우기 위해 '돈키호테'를 읽자"고 국민에게 호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정부는 이 책을 100만 부나 찍어 무료로 나눠주었다. 포르투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호세 사마라구의 서문과, 신기한 모험과 방랑의 고전적인 삽화가 실린 호화판 장정이라고 한다.

석유가 화근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제5위의 산유국으로 수출 대전의 80%와, 정부 재정의 절반이 석유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혜택이 고르지 않다. 인구 40%의 절대 빈곤층은 기초 교육과 의료 서비스조차 제대로 못 받지만, 중산층은 석유산업에서 나오는 국물로 플로리다 휴가를 꿈꾼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당시 우리는 금반지를 뺐는데, 1989년 저유가와 외채 상환 실패로 긴축에 내몰린 베네수엘라에서는 'IMF 폭동'으로 300명이 죽었다.

1976년 이래 이 나라의 석유산업은 국영이다. 페데베사(PDVSA)는 종업원 4만 명의 세계 최대 석유회사인데, 부패한 경영진과 노조가 짜고 공사를 사유물로 만들었다. 배럴당 채굴 비용이 서구 회사들의 3배가 넘고, 1981년 석유 판매 1달러에 71센트이던 재정 수입이 사내의 가격 조작으로 2000년에는 39센트로 떨어졌다. 방만한 경영의 책임을 물어 경영진을 교체하면 노조가 반발하고 나섰다. 정부는 석유 이익금으로 빈곤층 지원 사업을 추진했으나, 국영 공사가 대통령 퇴진 운동을 주도하고 '검은 황금'에 취한 기득권층의 반란이 여기에 가담했다.

차베스 역시 좀 별난 인물이다. "한쪽에서는 군인이 된 농민들이 게릴라가 된 농민들을 고문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게릴라가 된 농민들이 군인이 된 농민들을 죽이는" 참상을 보고 한때 혁명을 기도했노라고 노벨 문학상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에게 토로했다. 혁명에서 정치로 수단을 바꾸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쿠데타.파업.시위 등 격한 저항에 부닥쳤다. 그때마다 민중의 지지로 위기를 극복했다. 2004년에는 세계 헌정 사상 초유로 대통령이 소환 투표까지 당했는데, 이 소환 투표법은 자신의 축출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발의로 제정된 것이었다.

석유에는 항상 외세가 따라다닌다. 미국은 수입 원유의 20%가량을 베네수엘라에서 조달한다. 차베스는 "정유를 만드는 비용이 얼마인데 물 값이나 콜라 값보다 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면서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감산을 통한 고유가 정책을 주도했다. 석유 메이저들이 PDVSA 경영진과 결탁해 민영화를 선동하자 그는 외자의 합작 비율을 50% 이하로 제한해 버렸다. 그 밖에도 카스트로를 형제라고 부르면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또 다른 테러'라고 비난하고, 걸프전 이후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이라크를 방문하는 등 미국의 심사를 자주 긁었다. 돈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했는데, 차베스는 거인을 풍차로 오인한 셈인가.

차베스의 '돈키호테' 독서에 자칼도, 군대도 온당하지 않다. 민중에의 호소에 대해서도 서구라면 다수결 원리라고 존중될 일들이 이곳에서는 쉽게 우둔한 포퓰리즘으로 야유되곤 한다. 이 뻔뻔한 고정관념이야말로 지역 차별이고 인종 차별이며, 우리한테 깃든 '편안한 파시즘'이다. 올해 '돈키호테' 발간 400주년에 맞춰 한국에서도 최초의 완역판(시공사.2004)이 나왔는데, 전설적인 프랑스 펜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1863년 불어판 삽화가 든 멋쟁이 책이다. 이 땅에도 없앨 불의와 고칠 세상사가 허다하지만, 설익은 개혁 전사들의 돈키호테 흉내에는 진작부터 질리고 있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