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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IBM이 스스로 한 빅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잠시 귀국한 길에 요즘 한창 힘이 실려 있는 금융감독위원회를 찾아 한문수 (韓文洙) 상임고문을 만나 봤다.

韓고문은 시카고에서 30년간 닳고닳은 공인회계사다.

"재벌해체 잘 돼갑니까. " "대한민국에 재벌을 이길 장사가 있습니까. IMF가 아니면 대통령도 못당합니다. "

마침내 5대그룹 계열사 2백60개를 1백30개로 줄이고 주력기업을 팔아 20조원의 빚을 갚기로 정부와 재계가 합의했다.

재벌과의 줄다리기에서 정부의 승리라 하고 또 한편에선 밑그림, 큰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아직도 한국의 개혁의지를 믿지 않는다.

정부에 의한 개혁이지 기업 스스로의 변화가 아닌 때문이다.

"밑동은 그냥 두고 가지만 치고 있다 (pruning, not cutting)" 는 반응이다.

그렇다고 외국말만 듣고 밀어붙일 수는 없다.

개혁은 해고요, 빅딜은 실업 (失業) 이다.

빚살만 디룩디룩 찐 재벌이 밉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경쟁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교각살우 (矯角殺牛) 의 우 (愚) 를 범할 수는 없다.

우리는 변화에 쫓겨 변화하는 방법을 잊고 있다.

기업관 (觀).기업정신.기업방식을 바꾸는 것은 몇개의 회사를 맞바꾸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10년동안 죽을 쑤다 기사회생한 IBM의 교훈을 되새겨볼 만하다.

IBM본사는 뉴욕 교외 필자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숲속에 있다.

빌딩숲이 아니라 서울 청계산 암자마냥 산기슭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겉보기엔 세계최고의 기업조직을 움직이는 사령탑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IBM은 80년대 들어 지지리도 장사가 안돼 10만개의 일자리를 없애고 한해 70억달러씩 적자를 내더니 93년 리더십이 바뀌면서 오뚝이마냥 일어나 또 한번 IBM 신화를 창조해냈다.

그 IBM이 최근 이사를 했다.

이사라야 같은 산자락에서 1㎞도 안되는 곳으로 옮겨 앉았다.

하지만 사고 (思考) 는 지구를 떠나 화성쯤으로 훨훨 난 이사였다.

새 사옥은 건평이 1만평도 안되는 3층건물이다.

본사는 장기전략과 재정을 다룰 뿐이어서 모든 기능을 분산 자동화한 미래경영의 조타실을 보는 듯했다.

그 흔한 지하 주차장도 안 짓고 가구도 낡은 것을 옮겨 왔지만 IBM빌딩에는 온통 초고속 네트워크가 깔려 있다.

새 사옥은 Z자 모양새다.

하지만 지퍼를 채우지 않고 헐렁하게 풀어 젖힌 꼴이다.

사무실의 벽과 칸막이를 시원스레 튼 것이다.

아이디어의 개방과 지식의 공유, 그리고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과 팀워크의 상징같다.

이 집은 IBM을 다시 살린 루 거스너 회장의 꿈을 가꾼 설계였다.

지적 창조시대를 이끌려는 최고경영자의 의지가 서려 있다.

지난날의 영광은 묻었고 성공의 틀을 깨자는 것이다.

큰 고객 위주로 메인프레임에만 안주하다가 작은 거인들에게 시장을 잠식당한 쓰라린 경험 때문이다.

판매본부장에 린다 샌포드라는 여성을 앉힌 것부터가 파격이다.

연 매출액 8백억달러중 70%를 벌어들이는 자리다.

11개팀장중 10명이 남자고 1만7천명의 세일즈맨을 거느린 그녀는 명문대 MBA (경영학 석사)가 아니라 타이프라이터와 프린터를 팔던 하위직 판매원 출신이다.

하지만 꿩잡는 게 매라고 슈퍼에서 하루 40만건의 주문을 처리하는 나비스코같은 보수적 회사를 고객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어렸을 적 롱아일랜드농장에서 일하며 해질 무렵 딸기를 몇상자 거두었는지 챙기던 산교육이 MBA코스보다 중요한 체험이었다고 말한다.

그같은 책임경영은 거스너 회장의 솔선수범에서 우러나왔다.

올해 연임된 회장의 보수는 2003년까지 2백만주의 주식이다.

현재 1백60달러인 IBM주가 2백50달러가 되면 5억달러의 사나이지만 회사가 망하면 빈털터리가 될지도 모른다.

시장에 끌려가지 않고 시장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한국의 김우중 (金宇中)' 이다.

늘 비행기를 타고 해외시장에 떠 있다.

뉴욕증시가 곤두박질하던 블랙먼데이땐 35억달러를 풀어 자사주식 매입으로 시장 흐름을 바꿔놓았다.

IBM의 또 다른 변화는 주력사업으로 돌아간다는 기업정신의 확인이다.

새 사옥에 들어서면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기원전 4000년 메소포타미아 계산돌부터 전자타자기 혁명, 그리고 인간두뇌를 물리친 '장기 챔피언' 을 전시해 놓고 컴퓨터산업의 선구자로서 한 우물을 파겠음을 다짐한다.

이번 AT&T와의 빅딜 (대기업간 사업교환) 이 좋은 본보기다.

국제네트워킹은 통신업체에 넘기고 AT&T로부터 정보센터를 인수한 것이다.

양측 종업원 7천명은 단 한사람도 건드리지 않고 90억달러의 사업만 주고 받는 신종 (新種) 빅딜이다.

주력사업에 초점을 둔 아웃소싱 (외부발주) 의 묘 (妙) 로 중복투자 없이 서로 상대방의 고객층까지 파고들어 초일류 서비스를 기하려는 것이다.

빅딜의 계절이다.

하지만 빅딜을 꽃피우는 것은 정부가 아닌 최고경영자의 상상력이다.

최규장(재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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