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재벌해체 이후의 대책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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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년여 전이다.

경쟁력연구의 세계적 권위인 미국 하버드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 교수가 홍콩에서 발간되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에 한국 재벌을 분석.비판한 글을 크게 실었다.

'백화점식 확장경영' 으로는 장래가 없다고 단언하고 굳이 '기업그룹' 을 고집한다면 월트 디즈니처럼 핵심역량을 위주로 한 '미키마우스 기업제국' 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재계의 일각이 발끈하고 곧 이어 "한국의 기업현실을 모르는 소치" 라는 우리쪽 반론이 실렸다.

다각화에 따른 시너지효과와 위험분산 등 선단식 경영의 이점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지적이었다.

호된 반박을 전해들은 포터 교수는 "한국적 특수성 하지만 본질적으로 내 얘기가 옳다.

길게도 말고 앞으로 한 5년만 두고봐라" 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5년은 고사하고 2년여만에 한국의 재벌은 사실상 해체과정에 들어섰다.

한국 재벌에 대한 '적신호' 는 80년대 후반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이는 동시에 정부 주도 - 수출지향 - 양적 성장을 축으로 하는 '박정희 (朴正熙) 모델' 의 한계를 알리는 경보이기도 했다.

양적 팽창을 자제하고 기술개발과 개방화.자율화.정보화의 촉진을 통해 질적 고도화로 방향을 틀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단군 이래의 호황' 과 저환율.저금리.저유가의 '3저' 현상에 가려 이를 읽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설비확장경쟁과 거품성장으로 오늘의 부실을 누적시켰다.

6공정부는 정치적 기반의 취약함을 덮기 위해 분배정의 등 인기 위주의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해 고비용.저효율의 사회적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김영삼 (金泳三) 정부는 효율과 추진력이 떨어진 한국 경제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민간주도.개방화.정보화.지방화 등 개혁의 구호는 그럴싸 했지만 실천이 따르지 않았고 마스터 플랜의 뒷받침이 없는 세계화 등 전시성 선언은 국가의 구심점마저 흐려놓았다.

'박정희모델' 의 견인차는 대기업그룹, 즉 재벌들이었다.

따라서 한국 경제의 문제점은 곧 재벌의 문제점이라는 등식은 누구도 외면할 수가 없다.

재벌은 마땅히 재편돼야 한다.

문제는 그 방향과 방법이다.

선단식 경영구조를 해체하고 계열사를 절반으로 줄인다고 저절로 경쟁력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재벌의 재편에는 기업단위의 전략은 물론이고 국가단위의 전략도 필요하다.

'박정희모델 이후' 한국 경제의 새로운 틀과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한다.

정부당국은 재벌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구조조정이 안된다며 해체를 서두르는 듯한 인상이다.

그러나 국가적 마스터 플랜이 없는 상황에서 해체는 자칫 산업기반의 와해를 불러올 위험이 크다.

현재 국제경쟁력을 가진 기업들은 거의가 재벌기업이다.이들은 밉든 곱든 우리 경제의 주춧돌들이다.

핵심역량 위주로 '헤쳐 모이게' 하려면 경쟁력과 경영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고, '제도는 일본식, 의식과 행동은 한국식' 인 우리 경제의 기본틀도

다시 짜야 한다.

동업자와의 '제로섬' 경쟁을 넘어 산업환경의 새로운 변화와 추세를 간파해 자기가치와 수익성을 높이고, 경쟁의 승부처를 글로벌하게 인식하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게임의 룰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여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느 의미에서 재벌 해체는 시간문제다.

부당내부거래와 상호빚보증을 못하게 법제화해 놓으면 가만 두어도 한 5년이면 저절로 무너진다.

7개업종의 빅딜 (대기업간 사업교환) 은 사실 정부의 강제적 개입없이 업계 자율로 이루어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고 정부가 매번 기업구조조정에 개입하는 구실은 될 수 없다.

정부와 재계.채권단이 일단 '밑그림' 에 합의한 이상 그 실천은 해당 재벌과 금융기관에 맡기고 정부는 이제부터 새로운 세기에 적합한 경제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국제적 경영전략가인 일본의 오마에 겐이치는 최신 저서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 투자은행들의 자문만 듣고 재벌해체를 밀어붙이고 있다며 "한국 경제에서 재벌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합격점을 줄 만한 정책은 청와대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고 주목할 만한 소견을 피력했다.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 이후 한국 재벌의 해체를 요구하는 바깥의 목소리는 물론 드세다.

그렇다고 대안없이 조속한 해체쪽으로 몰아붙일 수 만은 없다.

해체 이후가 더 중요하다.

핵심역량 위주의 수술에서 깨어난 기업들을 회복시켜 이들을 체계적으로 뛰게 할 한국 경제의 '그랜드 디자인' 은 무엇인가.

변상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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