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동물 씨마른다…밀렵꾼 2만여명 마구 잡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23일 오후 약재상가가 밀집해 있는 서울동대문구제기동 경동시장. 50대 남자가 주위를 서성거리다 한 가게로 들어간다.

주인은 단골인 듯한 이 남자와 귀엣말을 나눈 뒤 창고 한편에서 큼지막한 자루를 꺼내주고 돈을 받는다.

취재기자가 접근하자 가게 주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고 잡아뗐으나 손님은 "오소리를 구했다" 고 말한 뒤 급히 차를 몰고 떠났다.

취재기자가 경동시장을 돌며 "야생 고라니를 구하러 왔다" 고 구입을 타진한 결과 처음에는 "없다" 고 잡아떼던 상인들은 단속반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 "노루.오소리.너구리.고슴도치.청설모.뱀 등 뭐든 다 있다" 고 말했다.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도 사정은 비슷했다.

약재상.건강원 등이 밀집해 있는 이곳에선 야생동물 외에 야맹증 환자에 효과가 있다고 소문난 박쥐도 마리당 5천~1만원선에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야생동물의 씨가 마르고 있다.

밀렵꾼들이 전국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면서 천연기념물을 포함한 야생 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도심에서 버젓이 밀거래하고 있다.

한국동물구조협회 (회장 조용진)가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전국 36개 지역을 현지조사, 환경부에 제출한 '야생동물 불법거래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의 전문 밀렵꾼은 2만여명, 야생동물 밀거래 시장 규모는 연간 최소 3천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밀렵꾼들은 주로 지리산.오대산.월악산 등 백두대간을 무대로 활동하고 심지어 동네 야산에서 올가미.덫 등을 설치해 동물을 포획한 뒤 중간상에게 팔아넘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거래 가격은 혈액순환에 좋다고 알려진 야생 노루가 1백만원, 고라니 20만원, 너구리는 3만~5만원선에 팔린다.

또 박제용 동물은 희귀성 때문에 물범 1천만원, 독수리 5백만원, 저어새는 3백만원을 호가한다.

동물구조협회 최두현 (崔斗炫) 관리반장은 "돈벌이가 쉽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IMF로 인한 실직자 등이 겨울철 밀렵에 대거 몰려 올해는 밀렵꾼 숫자가 지난해보다 10~20% 증가할 것으로 보여 대책이 시급하다" 고 말했다.

양영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