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를 7년 만에 1위로 올려 놓은 조범현 감독을 팬들은 제갈량에 빗대 ‘조갈량’이라고 부른다. [김민규 기자]
◆“어려서부터 지고는 못 살았어”=김성근 SK 감독은 ‘조범현의 눈물’을 기억한다. 김 감독은 “1970년대 후반 충암고 감독 시절이다. 고교대회 8강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맞고 아쉽게 패했다. 포수 조범현이 목 놓아 울더라. 그를 달래 버스에 오르는 데 애를 먹었다. 조범현은 그렇게 승부욕이 넘쳤다”고 회상했다.
김 감독의 말을 전하자 조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스친다. “그 장면을 기억하시네”라며 웃던 그는 “어려서부터 지고는 못 살았다. 표현을 잘 못하는 성격이지만 경기에서 지고 나면 참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고교 시절 김 감독으로부터 “인사이드 워크가 뛰어났다. 또래 중 앞서 있는 포수”라고 평가받던 조 감독은 화려한 프로 시절을 맛보지 못했다. 결국 11년간(82~90년 OB, 91~92년 삼성) 615경기 출장, 타율 2할1리, 12홈런, 107타점의 기록으로 은퇴했다. 93년 쌍방울 코치로 부임하며 그는 “내가 선수 때 누리지 못한 영광을 제자들에게 맛보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조범현+제갈량은 조갈량=그의 뜻처럼 됐다. 90년대 초반, 쌍방울에서 박경완(SK)을 조련했다. 91년 고졸 신인으로 입단한 박경완은 조 감독의 손을 거쳐 현역 최고의 포수로 성장했다. 박경완은 “체계적으로 포수의 역할을 가르쳐 주시는 분을 처음 만났다. 블로킹 훈련만 하루에 700~1000번을 했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조 감독님 덕에 포수 역할에 눈을 떴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감독으로서 출발도 상쾌했다. 조 감독은 2003년 SK 감독 부임 첫해, 팀 창단(2000년)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2006년 SK가 6위에 그치면서 경질의 아픔을 겪었다.
다시 감독직을 받아 든 것이 2008년. KIA 감독으로 선임되며 새 출발했지만 첫해 성적은 6위였다. “성적을 내지 못하는 감독”이라는 비판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조 감독은 “성적에 너무 조급해하면 감독을 위해 선수가 무리하는 악영향을 낳는다”고 소신을 지켜 나갔다. 그리고 2009년, KIA는 선두권에 자리 잡았다. 그의 소신을 지켜보던 팬들은 ‘조갈량(조범현+제갈량)’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조 감독은 “더 좋은 성적을 내신 감독님이 많은데…. 고마우면서도 쑥스럽다”고 말했다.
◆“재계약? 그 생각은 아직”=올 시즌을 끝으로 조 감독은 KIA와 계약이 만료된다. 이런저런 말들이 난무한 상황. 조 감독은 재계약에 대한 질문에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순위 다툼이 한참인 지금 그런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남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