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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이진순 KDI원장 정책표류 비판 목청높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새 정권의 '실세' 이코노미스트로 알려진 이진순 (李鎭淳) 한국개발연구원 (KDI) 원장의 목소리가 최근 부쩍 커지고 있다.

李원장은 지난 23일밤 국민회의 의원연수회 강연에서 정부 경제부처의 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금융 구조조정이 미흡하고 금융감독위원회 주도의 부실기업 정리가 효과를 거둘지 우려가 크다고 포문을 열었다.

정부가 이달까지 1차 금융 구조조정을 마무리지을 예정이지만 李원장은 주요한 구조적 문제점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李원장은 지난 3월 취임한 이래 KDI가 국책연구기관이라는 한계를 의식하지 않고 '소신 발언' 을 자주 해왔지만 이처럼 꼬치꼬치 문제 삼은 것은 여느 연구원장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특히 그가 오래 전부터 'DJ캠프' 의 핵심경제참모로 활약해 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무게를 더하고 있다.

◇ 경제상황 인식 = 李원장은 외환시장이 안정을 회복했지만 대외신인도가 본격적으로 회복되고 금융시장 안정이 정착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밝혔다.

또 경기침체가 심화되고 있는 데다 디플레이션 압력을 감안할 때 금리도 여전히 높다는 것이다.

◇ 거시경제정책 = 그는 정부가 올 상반기에 좀더 과감한 재정정책을 펴지 않은 점을 아쉬워했다.

구조조정과 경기침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등 실기 (失機) 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정적자 규모를 처음에 너무 작게 잡았고 집행도 지연시켰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 (GDP) 의 6%내외 (26조원선) 까지 늘리고 조속히 집행해 경기침체 심화를 조기에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재정적자를 지난 5월 7조9천억원에서 8월 21조5천억원으로 늘려 잡았으며 내년에는 22조1천억원으로 예산을 짰으나 李원장의 주장과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 부실금융기관 정리 = 투명하지 못하다는 게 李원장의 생각이다. 정리과정에서 경영진.주주.채권자가 고르게 손실을 분담하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투신사와 5개 은행 정리때는 도덕적 해이가 재발하는 등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손실분담원칙을 공정하게 지키고 있다는 정부의 설명과 상반되는 것이다.

◇ 부실기업 정리 = 지난 6월 선정한 55개 퇴출기업중 20개사만 부도처리됐고 특히 5대 그룹 계열사는 다른 계열사에 흡수되는 등 실질적인 퇴출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부실채권 증가를 우려하는 금융기관이 자발적으로 부실기업 정리에 나서기 어렵다는 것이다.

워크아웃 (기업구조조정) 도 채권단과 해당기업간 이해 상충으로 추진 자체가 불투명해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워크아웃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올해말까지 일단락지어질 것이라는 정부평가와는 한참 다른 얘기다.

◇ 빅딜 (대기업간 사업교환) =李원장은 최근 추진중인 대기업 빅딜에 대해서도 효과가 불투명하고 되레 부실을 확대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했다.

우량기업과 부실기업이 합병하는 식의 빅딜은 동반부실화를 초래하고 여기에 재정을 지원하면 특혜시비와 통상마찰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5대 그룹이 이달초 빅딜안을 발표하자 산업자원부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했지만 청와대는 李원장과 마찬가지로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 은행 합병 = 은행수가 넘쳐나므로 합병이 바람직하다고 정부와 입장을 같이했다.

그러나 합병이 자율적으로 이뤄지지 않거나 퇴출해야 할 은행이 이를 모면하기 위해 합병하면 효과가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경영정상화 계획을 마련하지 못하는 부실은행이 무리하게 합병을 밀어붙일 경우 경제 전체적으로 득보다 실이 크다는 의미여서 주목된다.

그동안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자율' 을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막후에서 합병을 적극 추진해 왔다.

◇ 공적자금 지원규모 = 금융기관에 공적 자금을 충분히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금융기관의 잠재 부실여신이 예상보다 많은 데다 시장에서의 증자가능성도 불투명해 공적 자금이 정부추산 (64조원) 보다 훨씬 많이 필요할 것으로 봤다.

따라서 공적 자금이 얼마나 필요할지 다시 따져 본 뒤 서둘러 마련해야 시장에 신뢰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국.공채를 한국은행에 저리 (低利) 로 떠넘기는 방식은 자제할 것을 권했다.

정부도 공적 자금을 충분히 지원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면서도 일단 64조원으로 꾸려보겠다는 입장이다.

한은의 국.공채 인수에 대해서는 정부내에서 찬반의견이 나뉘는 등 논란이 있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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