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그린수기]15.돈 구하려 '심봉사'된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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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는 이제 캐나다로 향한다. 언론에서는 내가 4승을 거둔 것을 떠들썩하게 보도하지만 나는 벌써 나의 우승을 잊었다.

내 머리속에는 오로지 이번주 벌어지는 올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뒤 모리에 클래식대회 생각밖에 없다.

지난날의 우승은 아버지 것이고 앞으로의 우승은 나의 것이다.

나는 우승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아빠, 좋지?" 하고 묻는다.

지난 5월 LPGA챔피언십대회에서 미국무대 첫승을 올렸을 때도 전화로 그렇게 물었다.

우승 순간 제일 먼저 생각나는 얼굴이 아버지 얼굴이다.

아버지는 내가 우승하면 좋아했고 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골프 선수를 꿈꾼다는 것은 1년에 웬만한 집 한 채를 거뜬히 날려버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집에 남아있는 돈은 1천여만원에 불과했다. "거리로 나앉을 뻔했지?" 아버지는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당시 엄마가 아버지를 대신해 꾸려나가던 건축자재 판매업은 시원치가 않았다.

집에 돈이 다 떨어져가자 아버지는 그동안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도움을 청했다. 연습비.라운드 비용 등 돈 들어갈 구멍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보고 효녀라고 하지만 나는 내 연습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집저집 찾아다니는 아버지가 '심봉사' 같다고 생각했다.

심봉사는 동정이라도 받았지만 아버지는 등 뒤로 눈총을 받았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골프는 무슨 골프를 시키느냐" 고. 내가 중학교 2년 때부터 각종 대회에 출전하면서 아버지와 나는 다른 선수 부모들과 어울리지 않고 기사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설움을 꼽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선수 부모들이 함께 식사하게 될 경우 보통 신참선수 부모가 음식값을 내는 게 관례였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두고 봐라" 고 별렀고 나는 "기필코 성공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겠다" 고 다짐했다.

우리의 다짐은 조금씩 실현되기 시작했다.

중학교 3년 때 여주골프장에서 벌어졌던 중.고연맹 회장배대회에서 첫 우승을 했다. 이 대회는 잊혀지지 않는 일화가 있다.

아버지는 대회시작전 나를 데리고 다짜고짜 클럽하우스로 가시더니 우승컵을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한번 안아봐" 하고 말씀하셨다.

"혼나면 어쩌려고요. " 나의 겁먹은 대답에 아버지는 우승컵을 확 집어들더니 "이틀 후엔 이건 네거야. 임마" 라고 하셨다.

나는 우승컵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 우승컵은 결국 내것이 됐다. 이 우승으로 우리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아버지의 어깨는 펴졌고 사람들은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밥값을 내겠다는 학부모들도 생겼다. 나는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됐다.

같은해인 92년 가을 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출전하는 라일앤스코트 오픈대회에서 당시 국내 여자골프 1인자였던 원재숙 프로를 물리치고 우승한 뒤 드디어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문마다 '확실한 기대주' 가 탄생했다며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나를 포환던지기 선수로 키우려던 선생님도 이제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 이 수기는 박세리 선수의 구술을 받아 김동균 뉴욕특파원.체육부 김종길 기자.LA지사 허종호 기자가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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