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뒤러 '나체와 수치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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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독일 브레맨 대학에서 문화사와 민속학을 강의하는 한스 페터 뒤러 교수의 '나체와 수치의 역사' 는 제목이 보여주듯 무척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까치刊) .동서양을 넘나들며 인간사의 가장 민감한 사안인 '성' 문제를 나체와 수치라는 두 핵심어를 축으로 풀어나간다.

게다가 야담집이나 일화집을 연상시킬 만큼 구체적인 사례가 줄줄이 이어져 책 읽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고대 그리스의 나체의 영웅들, 이슬람 교도의 목욕탕, 침대 속에서의 수치, 유아의 성문제, 유럽 문화와 이국 문화에서의 소변.대변.방귀, 성불능의 입증과 공개적인 성교 등 소제목 자체만으로도 일반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사람들의 '내밀한' 곳을 조심스레 건드리고 있다.

하지만 가벼운 읽을 거리로 기대해서는 곤란. 4백70여쪽에 이르는 본문 가운데 3분의1 가량이 주석과 참고문헌으로 채워질 만큼 엄격한 학문적 자세를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 수세기 동안 서양사회가 유지.확대시켜온 성문화에 대한 편견을 가감없이 비판해 주목된다. 계몽주의 이래 서양 문화권에서 지배적인 문명이론으로 인정돼온 상식 아닌 상식을 공격하고 나선 것. 즉 원시인이나 중세 사람은 현대 서구인에 비해 충동과 감정에 덜 얽매였으며 규제도 덜 받았다는, 다시 말해 본능을 절제하는 욕구가 상당히 낮았다는 주장을 보기 좋게 뒤엎고 있다.

예컨대 뉴기니 산지에서 벌거벗고 생활하는 쿠오마족의 경우 어린 아이라도 부인이나 처녀의 음부를 훔쳐보다가는 친척들로부터 중벌 (重罰) 을 면할 수 없고, 남녀가 함께 목욕했던 중세 유럽의 야외 목욕탕에서도 여성들의 젖가슴 노출은 엄격하게 금지됐다는 등 다양한 보기를 들며 "나체에 대한 수치는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고 역설한다.

때문에 저자는 원시인들이 나체와 섹스를 공공연하게 즐겼다는 종래의 시각은 단지 서구인들이 조작해낸 신화에 불과하며, 나아가 '미개한' 사람들을 교화하여 참된 인간으로 만든다는 미명하에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써먹었던 허상이라고 꼬집고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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