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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레온 ‘장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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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마술의 창조자는 경기도 파주시 예송농원(www.yeasong.kr)의 권형일(43·오른쪽 위 사진) 대표. 매직 로즈를 개발해 특허권을 갖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평범한 자영업자였다. 충북대 무역학과를 나온 뒤 고향인 충북 제천에서 자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1994년 파주로 이사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장미 농원이 많은 것을 보고 먹고살 만은 하겠다 싶어 자신도 장미 농사를 택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께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반포 강남터미널 꽃시장에 작은 가게를 차려 직접 팔았다. 권 대표는 “먹고살 만큼은 벌이가 됐다”고 했다.

그러나 2004년 암초를 만났다. 신용카드 대란으로 모두 지갑을 닫았다. 가게엔 팔리지 않은 장미가 쌓여 시들어 갔다. 그때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장미를 보관했다가 6개월 뒤에 팔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 방도를 찾아 나섰다. 연구기관에 개발을 맡길 만한 돈이 없어 스스로 연구를 했다. 방부 약품에 장미를 담갔더니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꽃잎의 색이 빠지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장미에 다시 색을 채워넣는 방법을 궁리했다. 책과 인터넷을 뒤지고, 화공약품상들에게 귀동냥으로도 정보를 얻어 실험을 했다. 색소와 화학약품을 섞어 용액을 만들었다. 여기에 장미 줄기를 담가놓고 꽃잎까지 용액을 빨아올려 색이 변하는지를 관찰했다.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담가놓은 꽃이 몇 시간 못 가 시들어버리는 일이 한참 동안 계속됐다. 권 대표는 “7개월 동안 색소와 약품을 바꿔가며 장미 수천 송이를 실험한 끝에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두 송이는 다른 색의 매직 로즈. 따뜻한 바람을 쐬어주자 색이 변했다. 오른쪽은 레인보우 로즈. [박종근 기자]


색소만 바꾸면 어떤 색의 장미든 만들 수 있었다. 이게 창조의 첫 단추였다. 신용카드 대란으로 인한 위기가 그를 창조의 길에 들어서게 한 셈이다. 개발을 마친 뒤 소비자들이 어떤 색을 제일 좋아하는지 살피는 시장조사를 해서는 2006년 파스텔 톤의 보라색·연두색 장미를 처음 시장에 내놨다. 당시 흰 장미 값의 네 배인 송이당 750원에 도매상에 넘겼다.

파스텔 톤 장미가 서서히 인기를 끌 무렵, 인터넷에서 네덜란드 농가가 만들었다는 ‘레인보우 로즈’를 봤다. 꽃잎 하나하나가 색이 다른 장미였다. 권씨는 이틀만에 이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장미 줄기 속에는 수분을 나르는 ‘물관’이란 게 여러 개 있습니다. 각 물관들은 각기 다른 꽃잎에 이어져 있고요. 그러니 물관마다 다른 색소를 넣어주면 레인보우 로즈가 나오는 것이지요.”

레인보우 로즈를 만든 뒤 자신감이 붙었다. 뭔가 또 다른 히트작을 만들 수 없을지 궁리했다. 그러다 ‘밤에도 볼 수 있는 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보니 ‘축광물질’이란 게 있었다. 빛을 저장했다가 어두울 때 뿜는 물질이다. 이걸 용액에 섞어 꽃잎이 빨아들이게 했다. 야광 장미는 이렇게 탄생했다.

매직 로즈는 맥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먹기 좋은 온도일 때 라벨에 파란색 표시가 나타나는 맥주를 보고서였다.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색소가 있다는 얘기였다. 여름용으로 25도에서 색이 변하는 장미, 봄·가을용으로 18도에서 색이 바뀌는 장미까지 만들었다.

매직 로즈를 시장에 내놓은 게 지난해 하반기. 일본 무역상까지 신기한 장미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올 초 수출을 시작했다. 송이당 3500원에 내보낸다. 900평짜리 농원에서 재배하는 장미만으로는 물량을 대지 못했다. 그래서 10여 농가에 기술을 가르쳐주고 위탁생산 채비를 차리고 있다. 매직 로즈 사업을 하겠다며 미국·호주·아르헨티나에서 찾아온 교포들에게는 기술을 주고 로열티를 받기로 했다.

권 대표는 지금 또 다른 창조 작업을 하고 있다. 향기를 활용한 ‘아로마테라피’가 인기를 끄는 것에 착안했다. 그는 “수험생의 집중력을 높여주는 향기, 불면증을 해소해주는 향기 등을 내는 ‘아로마틱 로즈’를 곧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창조 농업인이 되려면

● 그저 해오던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만 하려는 습성을 버려라. 그리고 항상 의심해라. 1년에 병충해 방제를 두 번 해야 한다고 하면, ‘왜 한 번만 하면 안 될까’ 생각하라.

● 어떻게 소비자를 즐겁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네모난 수박, 노란 수박도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꽃이나 과일만 가능한 게 아니다.

●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라. ‘갈 데까지 가 보겠다’는 각오로 노력해야 한다.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까지는 수많은 실패가 따른다. 하지만 실패하는 순간에도 당신은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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