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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의 살벌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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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33면

“나이 들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다 물려주고 용돈을 타쓰는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끝까지 재산을 쥐고 있어야 자식들에게 대접을 받는다는 슬픈 전제가 깔려 있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한 가정의 재산도 이러한데 한 국가의 권력은 말할 것도 없다. 세습 왕조에선 세자로 책봉받았다 해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밉보이면 언제든 쫓겨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은 왕세자에서 폐위돼 임금 자리는 셋째인 충녕대군(세종)에게 넘어갔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 속 죽임’까지 당했다.

양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종은 아버지로부터 임금 자리를 양위받았지만 군권만은 못 얻었다.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군사를 움직였다는 이유로 총애하는 신하의 목이 날아가는 모습을 뒷전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권력 앞에선 부자지간이라도 비정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청나라 건륭제는 1795년 재위 60년을 채운 뒤 아들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됐다. 61년간 재위한 할아버지(강희제)보다 더 오래 황제 노릇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달았다. 하지만 그는 17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열다섯째 아들인 가경제는 황제에 올랐지만 아버지인 태상황의 뜻을 거스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국고를 거덜내던 간신배조차 숙청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총애했기 때문이다.

일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11~12세기에 고산조 천황, 시라카와 천황, 도바 천황, 고시라카와 천황은 후계자에게 양위하고 태상천황(줄여서 상황)으로 물러앉았다. 상황이 불교 승려가 되면 태상법황(줄여서 법황)으로 불렀다.

고산조 천황은 양위한 뒤 원청이란 기구를 설치했다. 양위를 받은 후계자가 너무 어려 대리통치 기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달았다. 그 뒤를 이은 시라카와 법황은 원청을 통해 실질적인 통치를 했다. 원청을 경호한다는 명분 아래 전국의 무사들을 소집해 무력을 장악했다. 불가에 귀의한다 해서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린 게 아니었다. 권력의 살벌함은 종교도 순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권력 세습의 살벌함을 잘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 미국 다트머스대의 중국 사학자인 사라 앨런 교수에 따르면 권력이 성인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던 요순 시대에는 왕위 변화를 표현하는 동사로 사양할 양(讓)과 ‘물려주다’는 뜻이 있는 선(禪)·전(傳)·수(授)·여(與) 등을 사용했다. 하지만 세습 왕조 시기였던 하·상·주의 삼대 시대에는 세울 립(立), 죽일 시(弑), 벨 주(誅), 칠 벌(伐)과 ‘쫓아내다’는 뜻이 있는 놓을 방(放), 죽일 살(殺) 등 섬뜩한 단어들이 동원했다(『선양과 세습』사라 앨런 지음, 오만종 옮김, 예문서원).

북한에서 3대 세습이 시동을 거는 모양이다. 역사는 이를 어떻게 기록할까. ‘김씨 왕조’라고 할까, 아니면 ‘공산 왕조’라고 할까. 그보다 한반도에 어떤 바람이 불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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