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컴퓨터시대 아이들]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자기 PR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요즘 아이들이 제일 받고 싶어하는 선물은 CD롬.게임기 등 컴퓨터관련 기기. 부모들이 '전화' 로 안부를 나눌 때 컴퓨터세대인 청소년들은 컴퓨터 통신으로 토론을 벌인다.

사고방식.행동양식에 많은 변화를 보이는 컴퓨터시대 아이들을 진단한다.

"우리학교 컴퓨터 담당 선생님은 정말 바보에요. 제가 전산실에서 램을 8메가나 빼왔는데도 며칠째 눈치조차 못채고 있다구요. " PC통신 청소년상담가인 서영창 (47.중앙여고) 교사는 얼마전 어느 중2 남학생에게서 이런 '무용담' 이 담긴 전자우편을 받았다.

"신분이 들통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대담하게 도둑질까지 자랑하는데는 저도 놀랐어요. 그렇게까지 조롱당하는 교사가 안쓰럽기도 했구요. " 컴퓨터는 이제 청소년들의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컴맹' 인 어른들은 철저히 따돌리는 폐쇄성을 보이면서도, 일단 통신명 (ID) 을 가진 이는 취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나이를 불문하고 친구로 대하는 것도 컴퓨터시대 아이들의 특징. 인터넷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데도 두려움이 없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컴퓨터와 '놀며 자란' 임형구 (15.영동고1학년) 군. 그는 방과 후면 하이텔의 각종 스포츠동호회 소식부터 확인한다.

회원들의 나이는 말그대로 '중딩 (중학생)' 부터 '직딩 (직장인)' 까지. "지난 겨울 국내농구프로리그 때 하이텔 현대팬클럽회원들의 얼굴을 처음 봤어요. 21살의 시삽누나도 원래 알던 사이처럼 반가왔고, 아버지같은 어른들과도 얘기가 잘 통했죠. " 반면 '얼굴없는 만남' 은 단절도 쉽다.

중2때부터 1년여간 한 여학생과 전자우편을 주고 받았지만 "연예인 얘기등을 나누다가 재미가 없어 끊었는데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이 안난다" 고 임군은 말한다.

그 '익명성의 보호막' 앞에서 지나칠만큼 솔직한 컴퓨터세대는 신분이 알려진 상태에서는 철저히 자신을 감추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천리안의 청소년들의 이성교제장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 에는 이성친구를 구하기 위해 과감한 자기선전에 열을 올리는 10대들이 5천여명. "난 정말 예쁘고 깜찍한 소녀예요. 쌈빡한 여자친구가 필요해 연락하면 후회안할거예요" (월촌중2학년) 정도는 약과. 자신의 키와 몸무게를 밝히는 여학생들도 수두룩. 남학생들도 '섹시남' 을 강조한다.

하이텔의 이경희대리는 "온라인상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실제 만나면 감정표현도 잘 못할 정도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이 많다" 고 말한다.

PC통신이 사춘기고민해결의 주요수단으로 자리잡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서교사는 "지하철에서 자살을 목격한 뒤 우울증에 걸린 고3학생이 여학생 면전에서 망신을 준 친구를 죽이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려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어요. 그앤 정신과치료까지 받았지만 그 고민의 뿌리를 끝내 밝히지 않아 의사조차 고3스트레스라고 오진했더군요. " 하지만 그 학생도 PC통신을 통해선 서교사에게 솔직했고, 덕분에 '살인' 을 막을 수 있었다.

신세대의 언어문화에도 컴퓨터는 결정적인 역할. '어솨요 (어서 와요)' 등 줄임말을 쓰는 것이 일상화되고, ':) (미소)' ':D (웃음)' 'T.T (눈물)' 등 나름대로 재치있는 통신언어를 개발하지만, 표정.말을 통한 감정표현에는 서투른 부작용도 나타난다.

또 초등학생까지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해 숙제를 하다보니 8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서울에 수십곳 있던 펜글씨학원은 이제 한 곳만 남았다. 상록펜글씨학원의 서정진 (63) 씨는 "전엔 강습생의 20%이상이던 초중고생들이 이제 한명도 없다" 고 들려준다.

글씨를 못쓰는 아이들이 늘자 일부 학급에선 서기도 뽑기 어려울 정도. 서울사대부속여자중학교의 손신애 (29.여) 교사는 "컴퓨터를 쓰지 않는 학생들조차 샘물체.딸기체 등 컴퓨터 글씨체를 흉내내는 것이 유행" 이라고 전한다.

컴퓨터세대들은 기존의 위계질서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전산원 정보화연구실 최성모박사는 "정보화시대 아이들로부터 컴퓨터를 배울 수 밖에 없게 된 어른들이 종종 아이들에게 핀잔을 받는 '하극상' 이 나타나기도 하고, 어른보다 아이들이 값비싼 컴퓨터기기의 구매를 결정하는 소비주체가 되고 있다" 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컴퓨터세대의 장점을 적극 수용.발전시키는 것만이 기성세대로서의 위신을 찾을 수 있는 길" 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수·김창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