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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 싸는'장수생'…신림동 고시촌 썰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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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0년째 서울 신림9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을 준비 중인 박모(37)씨는 요즘 시험공부를 계속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던 '장수생'(장기수험생) 3명은 이미 짐을 싸들고 고시촌을 떠났다. 지난달 21일부터 4일 동안 2차 시험까지 치른 박씨가 고민하는 것은 달라진 시험제도 때문이다.

특히 올해 도입된 민간 영어시험에 그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2차 시험에 낙방해 내년에 다시 1차 시험을 보려면 토익(700점).토플(530점).텝스(625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일정한 점수 이상을 받아야 한다. 영어책만 달달 외우던 그에게 듣기평가가 들어 있는 새로운 시험은 두렵기만 하다.

박씨는 "고시원에 30세를 넘긴 고시생이 지난해 10명이었으나 지금은 3명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림동 고시촌이 썰렁해지고 있다. 서울대가 곁에 있는 신림9동은 고시 정보를 빨리, 많이 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고시생들이 몰렸고, 고시원.고시학원이 가세해 그동안 고시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려왔다.

그러나 프랑스어.독어 등 제2외국어를 선택해 공부하거나 실전 영어에 자신이 없는 나이가 든 수험생들이 겁을 먹고 하나 둘 떠나면서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올해부터는 외국어 시험과목이 영어 하나로 통일됐다. 고시학원을 운영하는 이민수(42)원장은 "10년 이상 오랫동안 고시를 준비한 수험생들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향토 장학금'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마냥 사시에 매달리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고시생들이 이탈하면서 이들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던 주민들도 어려움이 많다. 고시원을 운영하는 이모(49)씨는 "2년 전만 해도 한달 전에 예약해야 들어올 수 있었으나 지금은 방 36개 중 17개만 고시생들이 입주해 있을 뿐"이라며 "그나마 나는 형편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장수생이 몰려 있는 신림9동 언덕배기에는 고시원마다 '빈방 있음'이라는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 이상호씨는 "신림9동 고시원 중 30%가 가격을 낮춰 급매물로 내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장수생들의 이탈은 사법시험 1차 응시자 수에서도 알 수 있다. 올해 1차 응시자는 1만5400여명으로 지난해의 63.1%에 그쳤다. 특히 35세 이상의 응시 비율은 지난해 15.9%에서 11.4%로 줄었다.

한편 합격자 1000명 시대가 열리면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진로를 고민해야 할 만큼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것도 고시생들이 중도 포기하는 원인이다. 사법연수원에 따르면 올해 2월 연수원을 수료한 33기 966명 중 19.6%만 판.검사로 임명됐다. 법무법인.법률사무소 등에 취업한 사람도 33.7%에 불과하다.

이경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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