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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작가의 각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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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지구가 대재앙으로 초토화된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먹을 것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공격한다. 따뜻한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에겐 하루 하루의 삶이 공포요, 고문이다.

2007년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 『로드』의 배경은 묵시록에 가깝다. 굶주림과 혹한의 고통에 관한 세밀한 묘사가 현실감을 높이는데, 소설을 쓴 코맥 매카시(76)가 젊은 시절 겪었던 가난의 흔적들이다. 8년간 헛간에서 살기도 했던 그는 한때 치약 살 돈마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매카시는 거액의 사례비를 주겠다는 강연이나 인터뷰 제의를 거절했다. 다른 작가들과 어울리지 않은 채 글쓰기에 몰입했다. 그를 70대의 나이에 TV 토크쇼로 끌어낸 것은 오프라 윈프리의 끈질긴 설득이었다. 그는 그간 인터뷰를 거절해 온 이유에 대해 “내 방식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은둔 작가’로는 마루야마 겐지(64)를 꼽을 수 있다. 그는 22세 때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탄 뒤 도쿄를 떠났다. 아내와 함께 고향인 북부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원고료 수입만으로 살면서 소설 창작에 전념했다. 절제된 삶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도 갖지 않았다. 60대에 접어든 지금도 수도승처럼 삭발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그는 “창작이란 고(孤·외로움)의 자세로 정신의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라며 “문단에 종속되고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순간 소설은 엉망이 된다”고 말한다.(『소설가의 각오』)

며칠 전 시인 김수영의 ‘육필 시고 전집’이 발간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 만이다. 글씨를 눌러쓴 원고지 영인본엔 마침표 하나, 행 바꾸기 하나에도 절치부심하던 시인의 손길이 살아 있다. 그러나 요즘 우리 문단을 돌아보면 아직도 좌우의 편 가르기 속에 갑론을박하며 ‘애드립’만 쏟아 낸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른바 ‘황석영 변절’ 논란이 그랬다.

한국 문학이 위기라고 한다. 독자들이 일본 소설로, 미국 소설로 몰리는 걸 보면 “영상 매체에 중독된 독자들이 활자를 외면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혼신을 다해 파고들겠다는 각오 없이는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 소설가와 시인들이 원고지 앞에서, 노트북 앞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분발해 주길 기대해 본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