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회견]홍석현 본사사장-리콴유 싱가포르 선임 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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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금융위기로 아시아의 장래가 불투명할수록 사람들은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선임총리의 표정을 살피고 그의 말을 경청한다.

그는 일찍부터 태평양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던 사람이고 싱가포르라는 자원없는 도시국가를 개인소득 2만달러의 행복한 나라로 만든 사람이다.

그는 앞을 멀리 내다보는 비전과 현실문제를 정확하게 통찰하는 안목과 문제를 해결하는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다.

그는 1990년 총리자리에서 물러났지만상왕 (上王) 같은 선임총리 (Senior Minister) 로 국정의 큰 일에 계속 관여 하면서 아시아의 일과 세계의 일을 많이 생각하는 세계적인 지도자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인 그는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도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그런 리콴유를 그의 집무실 옆 작은 접견실에서 60분 동안 만나 금융위기를 포함한 아시아의 문제에 관해 얘기를 들었다.

홍석현사장=아시아가 금융위기를 맞은 것은 아시아의 개발모델이 한계에 왔기 때문이라는 견해에 찬성하십니까.

리콴유 선임총리=그건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같은 아시아라고 해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개발모델을 채택하고 있어요. 원조 (原祖) 는 일본모델이지만 한국과 대만의 모델은 일본모델을 수정한 것이고, 농업기반이 없는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와 홍콩은 또 다른 모델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아시아개발 모델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불신하는 것은 너무 단정적입니다.

洪= 아시아의 소위 '네 마리의 용' 중에서 한국만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20년 이상 개발도상국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던 한국 경제의 어디가 잘못된 겁니까.

李 =기업들이 이익을 무시하고 시장점유율에 너무 집착했어요.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일본 엔화가 1백대1 이나 1백10대1의 강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철강.조선.자동차.전자분야에 과감한 시설투자를 했어요. 심지어는 시장을 넓히기 위해 빌린 돈으로 동남아시아와 중국과 동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카자흐스탄.서유럽에까지 투자를 했습니다.

그러나 엔화는 1백20대1 또는 1백30대1로 떨어지고 한국기업들은 일본과 경쟁을 할 수 없게 됐어요. 거기서 문제가 시작된 겁니다.

한국은 시장의 경고신호를 무시했어요. 한국은 96년에는 엔화의 약세를 알아채고 과잉투자에서 발을 뺐어야 하는데 기세좋게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회복됩니다.

기술이 있으니까. 한국은 외국돈을 빌려다가 쓸모는 없고 화려하기만 한 기념비적인 계획에 쏟아부은 것이 아니라 산업시설에 투자했기 때문에 산업의 노하우를 가졌고 일본 말고는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화한 기술을 많이 축적했습니다.

洪=한국에 매우 고무적인 말씀입니다.

李=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게 79년인데 그때 한국인들은 집에서는 흑백 텔레비전을 보면서 컬러 텔레비전은 모두 수출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하면 달러를 빌리지 않고 원화로 경제를 키울 수 있었을겁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변했어요. 소비로 몰려 간거지요.

洪=그러나 한국 경제를 이만큼 키운데는 재벌이라는 제도의 기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재벌은 어떻게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까.

李=재벌이 없었다면 한국 경제는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산업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겁니다.

재벌기업이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한국 경제는 국제경제에 편입돼버렸고 IMF는 한국의 경제시스템이 세계의 경제시스템과 조화를 이룰 것을 조건으로 금융지원을 하고 있어요. 선택은 두가지입니다.

IMF 요구를 따르는 시늉을 하다가 경제가 회복되면 과거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게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IMF로 대표되는 앵글로색슨의 시스템을 채택해 국제적인 시스템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기업의 구조와 경영방식을 뜯어고쳐 GM.IBM.마이크로소프트.프럭터 - 갬블과 같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재벌기업 모두가 성공적으로 변신하지는 못할겁니다.

가장 탄탄하고 적극적인 기업만이 살아남겠지요. 지금의 50대 재벌중에서 10개나 15개 정도가 이런 개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지요. 洪=IMF체제 아래서 한국이 받아들여야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유대교와 기독교 자본주의가 차지하는 것이라는 일부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李=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어요. 회사운영에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고 어떤 소유구조를 갖고 경영은 누가하고 주주들과 근로자들에게는 어떤 권리를 보장할 것인가, 그리고 근로자의 고용안정이 중요한가, 주주의 수익보장이 중요한가, 미국과 같이 고용과 해고를 마음대로 할 것인가, 독일같이 사회계약 정신으로 근로자의 권익보호가 중요한가…우선 이런 시스템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로지 이익만 생각하면 미국방식이 단기적으로는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런 방식이 사회의 안정을 가져오고 국민과 정부, 기업주와 근로자간에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나라의 경제가 더 경쟁력을 가질지 자신이 없어요. 미국식은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아시아인의 입장에서 나는 그런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회가 분열되고 약화되는데 경제번영이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洪 = 미국 시스템을 말씀하셨는데 그건 아시아의 가치 (Asian values) 와 대비됩니까.

李=그래요. 아시아적 가치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습니다.

가족의 화목, 높은 교육열, 다음 세대를 위한 저축, 혁명과 화재와 기근을 당해서도 정부 도움없이 어려움을 이기는 능력같은 것은 아시아의 좋은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정실 (情實) 과 연고주의와 특혜는 청산해야 할 부정적인 가치들입니다.

洪=선임총리께서는 지난해 12월 독일의 경제주간지 비르트샤프트 보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위기는 인도네시아나 태국의 위기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이 동남아시아의 두나라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李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기술의 국산화 수준에서 한국에 훨씬 못 미쳐 철강.자동차.웨이퍼팹 같은 걸 생산하지 못하고 일본의 자동차와 일본의 웨이퍼팹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와 태국의 수술은 일본이 해야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재벌들이 계속 시장점유율에 매달릴 것인지, 저축을 생산에 얼마나 돌릴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합니다.

재벌기업을 운영하는 방식과 원칙을 바꿔야 한다는 뜻입니다.

洪=일본은 아시아 금융위기의 원인제공자이기도 한데 위기를 해결하는데 일본이 맡은 역할에 만족하십니까.

李= 문제의 발단은 일본입니다.

일본경제의 거품이 터졌을 때 정부지원으로 은행을 정상화하고 부실채권을 정리해 경제를 회복시켰더라면 엔화의 강세와 달러의 상대적인 약세를 유지해 지금같은 위기상황은 오지 않았어요. 미국은 80년대 후반 저축신용대부조합 (S&L) 들이 파산위기를 맞았을 때 연방정부의 자금지원으로 정상화시키지 않았습니까. 일본경기의 침체가 아시아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이기는 해도 일본이 우리들을 괴롭게 하려고 그런 정책을 쓴 건 아니지요. 일본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래서 미국은 지금도 계속 일본에 세금을 낮추고 지출을 늘려 수출주도가 아니라 내수주도로 경기를 회복시키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그러나 일본의 마쓰나가 히카루 (宋永光) 대장상은 런던에서 미국의 뜻에 따를 수 없다는 점, 일본의 지금 정책이 옳은 방향이라고 말했어요.

洪=인도네시아의 경제위기가 정치위기로 발전해 동북아시아와 미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해상수송로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근거 있습니까.

李=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식량부족 사태가 시민소요로 발전한다고 해도 인도네시아 해군이 외국 수송선의 항해를 방해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洪= 수하르토대통령은 통화위원회를 만들어 루피아화를 달러에 묶는 고정환율제에 큰 집착을 가진 것 같은데 그것이 금융위기 해결의 방안이 될 수 있습니까.

李= 통화위원회를 비행기에 비유하면 조종간만 있고 속력을 내는 액셀러레이터와 속력을 줄이는 디셀러레이터가 없는 것과 같아요. 루피아를 달러에 연동시키면 인도네시아 경제는 미국의 경제정책에 좌우됩니다.

고정환율제를 도입하려면 건실한 은행제도가 선행돼야 하고 국민과 노조가 거기에 적응돼야 합니다.

洪= 선임총리께서는 앞으로 20년 이나 30년 안에 태평양이 르네상스를 맞고 중국이 21세기의 초대형시장으로 등장한다고 예고하십니다.

태평양의 르네상스가 태평양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태평양시대는 오기도 전에 끝나는 겁니까.

李 = 그럴 수야 없지요. 태풍 한번 분다고 모든 게 끝장나지는 않아요. 태풍은 파괴력을 가졌어도 많은 비를 몰고 와 강물을 깨끗이 청소하기도 해요. 태풍이 지나간 뒤 곡식이 잘 자랍니다.

洪= 아시아 국가들은 앞으로 슈퍼파워 중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합니까.

李= 중국은 그렇게 쉽게 슈퍼파워가 안돼요. 중국은 대단히 강력한 나라가 될 겁니다.

그러나 슈퍼파워가 되려면 슈퍼급의 무기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중국은 앞으로 30년 또는 50년 안에 대단히 강력한 경제대국이 될 것이지만 미국.일본.유럽의 기술수준을 따라잡는 데는 한세대 이상이 걸려요.

洪 = 21세기에 미국은 동아시아에 10만명 이상의 군대를 계속 유지하는 전략을 확정했습니다.

가령 2010년 지정학적.전략적으로 아시아는 어떤 모습을 가질 것 같습니까.

李 = 2010년은 불과 13년 뒤인데.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힘의 중심이 이동하는 데는 20년이나 30년 걸려요. 힘의 중심은 미국보다 일본.중국, 아마도 러시아쪽으로 이동할 거예요. 30년이 아니면 50년 안에는 러시아가 확실히 이지역의 중요한 힘의 요소로 등장합니다.

러시아는 인구.과학기술.자원이 있는 나라 아닙니까. 경제가 충분치 않지만 러시아 경제가 60~70%만 시장화 (市場化) 돼도 엄청난 나라가 됩니다.

30년이나 40년 단위로 보면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관계로 남아있는 한 지금의 세력균형은 유지될 것이고, 일본이 독자노선을 걸으면 균형은 깨지며, 그 뒤를 예측하기 어려워요.

洪 = 중국이 경쟁력 유지를 위해 위안 (元) 화를 평가절하한다면 그 시기는 언제로 예상합니까.

李 = 중국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계속되는 와중에 위안화의 가치를 낮추지 않을 것으로 봐요. 그러나 일단 금융위기가 진정되고,가령 한국의 원화 가치가 위기 이전에 비해 30~50% 정도로 떨어지고,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의 통화가치가 30~40% 떨어지면 중국도 경쟁력을 위해 위안화를 평가절하할 겁니다.

그 폭이 10~15% 수준에 머무르면 경쟁적인 평가절하의 연쇄반응은 없을 것입니다.

洪 = 싱가포르가 아시아 금융위기에도 끄떡없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李= 싱가포르도 완전히 무사하지는 않아요. 싱가포르달러도 14%나 떨어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외국에 빚을 지고 있지 않습니다.

싱가포르달러는 여러 나라의 통화를 담고 있는 바스켓에 연동돼 있는 반면 그 바스켓에 들어 있는 다른 나라의 통화들은 달러에 고정돼 있는 게 달라요.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 통화의 금리가 높고 달러 금리가 낮아 달러를 단기로 빌려다 현지통화로 바꿔서 융자도 하고 투자도 했습니다.

달러값이 오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싱가포르의 경우는 미국달러가 오르고 싱가포르달러가 내려도 우리 금리가 낮기 때문에 미국 달러를 빌려 올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싱가포르는 예산.경상수지.자본수지가 모두 흑자라서 이 지역의 금융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겁니다.

洪=89년 1월 저는 삼성 이건희 (李健熙) 회장과 함께 바로 이 자리에서 선임총리를 뵙고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말씀중 지금도 깊이 인상에 남는 게 있습니다.

퇴임 후에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과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를 상대로 이웃나라들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성적은 어떻습니까.

李= 스스로 맡은 역할이 아니라 고촉통 (吳作棟) 총리가 내게 맡긴 임무지요. 吳총리가 바통을 넘겨받아 일을 잘 추진한 결과 수하르토 대통령 및 마하티르 총리와 좋은 관계를 갖게 됐어요. 나는 싱가포르에서 생을 얻은 걸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는 인류역사에서 믿을 수 없을만큼 감동적인 시대를 살면서 영국.일본.말레이시아.싱가포르 네 나라의 국가를 부르는 처지를 겪었습니다.

태평양전쟁중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는 일본군에게 붙들려 죽음 직전에 살아나기도 했어요. 나는 운이 있는 사람입니다.

洪 = 북한은 여전히 그 정체와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21세기초 한반도와 그 주변 안보정세가 어떻게 보입니까.

李= 북한은 역사상 유례가 없고 예측이 불가능한 정권이라 한반도는 어렵고도 모험이 따르는 전환기를 맞을 것으로 봐요. 굶주리는 백성들이 봉기하지 않는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북한 정권은 주민들의 마음과 정신까지 통제하기 때문이겠지요. 정상적인 사회를 기준으로 북한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洪= 읽으신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한 권을 든다면 어떤 책입니까.

李 = 아주 좋은 책인지 자신은 없지만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문화의 충돌' 입니다.

나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그 책에서 헌팅턴이라는 서양의 자유주의자가 문화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데 흥미있어요.

洪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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