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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8000가구 동 대표 뽑아라, 몸살 앓은 ‘아파트 민주주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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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우리 국민 10명 중 4명이 아파트에 사는 시대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경우 사는 세대가 웬만한 읍·면 더욱 많고, 입주민 대표회의가 집행을 감독하는 연간 관리비 규모도 수백억원에 달한다. 입주민 대표 선거의 참여 열기도 높다. 때로는 기성 정치판 같은 불법과 흑색선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또다른 현장인 셈이다. 최근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 아파트 단지에서 연이어 입주민 대표 선거가 치러졌다. 이를 계기로 우리네 아파트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중앙SUNDAY가 살펴봤다.

잠실 엘스아파트 정문에 주민들의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플랜카드가 걸려 있다. 신동연 기자

아파트 동 대표 선거를 하루 앞둔 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 엘스아파트 입주민관리센터 3층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선 한 차례 소동이 벌어졌다. 특정 모임 출신의 후보들이 업체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은 불법 유인물을 돌리던 동 대표 후보 A씨가 선관위에 적발된 것. 고성과 욕설이 오가자 경찰까지 출동했다. 선관위는 A씨에게 “후보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하자 A씨가 이에 반발하며 충돌이 생긴 것이다.

송춘자 선거관리위원장은 “선관위에 사전 등록되지 않은 유인물을 뿌리는 것은 불법 선거운동”이라며 “이웃 주민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아 가능하면 대화로 풀려고 노력해 왔지만 난동을 피우고 선관위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선관위를 무력화해 선거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선관위원은 “선거일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근거 없는 흑색선전과 갖가지 흉흉한 소문이 단지 내에 끊이지 않아 골칫거리”라고 했다.

정치판 선거에서나 있을 법한 이런 일들이 전국의 많은 아파트 선거에서 벌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5년마다 실시하는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2005년 기준) 전국 약 1588만 가구 중 660만 가구(42%)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대도시로 갈수록 아파트 거주 비율은 점점 더 높아진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서울 송파구의 경우 총 15만여 가구 중 아파트 거주가 8만8600여 가구로 60%에 육박한다.

아파트 문제를 다룬 『댁의 아파트는 안녕하세요』라는 책의 저자 김흥수씨는 “과거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만 인식되던 아파트가 최근 들어 삶의 질과 여건, 아파트 공동체 생활과 문화에 관심을 갖는 쪽으로 바뀌면서 아파트 선거가 점점 더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문화연대’ 최호종 대표는 “입주자 대표를 뽑는 선거는 지자체 선거 이전에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험 무대이자 산교육의 장이라는 측면에서 더 엄격하고 투명하게 관리돼야 하는데 점점 더 불법·탈법이 판치는 정치권 선거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경향이 있어 걱정스럽다”고 지적한다. 최 대표는 또 “국민 10명 가운데 적어도 4명 이상이 아파트 공동체에서 거주하고 있는 만큼 ‘아파트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아파트 선거 앞두고 흑색선전물 난무

서울 최대 재건축 단지인 송파구 잠실 일대에선 입주민 대표를 선출하는 ‘아파트 민주주의’ 실험이 한창 진행 중이다. 구 잠실 시영아파트 단지인 파크리오(6864가구)와 구 잠실 1단지 엘스(5678가구), 구 잠실 2단지 리센츠(5563가구)가 얼마 전 동 대표 선거를 끝냈다. 이 단지들은 하나같이 선거 몸살을 앓았다. 입주 가구가 웬만한 읍·면 단위 지역보다 크고, 말 많고 탈 많은 재건축사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치러진 선거인 만큼 다른 단지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입주민이 2만5000명인 파크리오는 한 달 관리비 총액만 20억원이 넘는다. 연간 25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의 집행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이 입주자대표회의(이하 입대의)에 주어지기 때문에 그 권한이 막강하다. 또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지는 각종 수익사업과, 시설 보수 등에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의 돈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있는 입대의가 어떻게 구성되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이 아파트는 2월 22일 45명의 동 대표를 뽑았다. 평균 투표율은 39%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비교해 훨씬 높다. 3년 전부터 인터넷 사이트에 카페를 만들어 재건축 과정을 견제·감시하는 활동을 해 온 한 입주자는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아파트 공동체 내의 선거에서 경력이나 전문성보다는 목소리 큰 사람들 위주로 선거판이 흘러간다”며 “헛소문이 나돌아 입주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 일들이 일어나 실망이 크다”고 했다.

단지 내 최고투표율(55%)과 최다득표(100가구 중 82표)로 동 대표에 당선된 민흥기(59)씨는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식의 네거티브 선거운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며 “앞으로 아파트 관리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공약에 담았는데 입주민들의 공감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잠실 엘스아파트의 한 동 대표는 “관리비·조경·성과급 문제를 비롯해 과거 재건축 사업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를 입대의가 꼼꼼히 따질 것”이라며 “입대의가 진정한 아파트 민주주의의 선발대 역할을 하기 위해선 입주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앙선관위가 아파트 선거 관리하기도

선거 과정에서 불법 행위는 비일비재하다. 잠실 엘스아파트 선관위 관계자는 “동 대표 후보자 중에 실제 거주하지 않으면서 주소만 이전해 놓은 것이 적발돼 후보 자격이 박탈된 사례가 있었다”며 “위장전입을 해서라도 굳이 동 대표가 되려는 것을 보면 뭔가 목적이 딴 데 있지 않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상대 후보의 약점을 잡고 이를 공개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많다.

2007년 11월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입주자 대표 선거 과정에서 어떤 후보자는 다른 후보자의 전과 기록이 담긴 자료를 검찰 관계자로부터 불법 입수해 입주민들에게 배포하다 사법 처리되기도 했다. 선거가 과열로 치닫자 국가가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2007년 1월 충남 천안시의 초원그린아파트 입주자 대표 선거가 형사고소·고발과 민사 분쟁이 계속되는 등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자 법원이 천안시 선관위 주관하에 선거를 치르도록 명령했다. 주민들의 공동체 선거에 국가가 직접 개입한 첫 사례였다.

잠실 엘스아파트 역시 아파트 선관위의 요청으로 송파구 선관위 관계자가 투표 당일 아파트를 방문해 선거 과정을 지켜봤다. 송파구 선관위의 한 관계자는 “투표 과정에서 있을 불공정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고 입주자 대표 선거 결과를 깨끗이 승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민간 선거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입주자대표회의 간부 비리로 칼부림도

선거로 구성된 입대의의 비민주적이고 불투명한 활동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1999년 경찰이 전국 아파트단지 비리를 수사한 결과, 비리 혐의가 적발된 5800여 명 중 아파트 동 대표가 890여 명, 입대의 회장이 925명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선거로 뽑힌 많은 입대의가 주민들의 불신을 사는 일이 잦다. 2005년 4월 광주시 북구 한 아파트 단지. 서로 친하게 지내던 입대의 전·현직 회장은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생겨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이후 전직 회장의 비리가 발견되면서 양측의 감정은 더 악화됐고, 전 회장이 이를 폭로한 현 회장에게 칼부림을 하고 달아나다 자동차 사고를 내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원인은 결국 아파트 입주민들의 무관심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최호종 대표는 “평소 입주민들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입대의 관계자들이 업체와 결탁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식의 아파트 비리가 끊이지 않는다”며 “아파트 민주주의 수준이 결국 국가 민주주의 수준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고성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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