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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개기업 법정관리 맡은 서울지법 합의50부…'사장'이 주업된 판사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18일 오전9시10분쯤 서울지법 민사합의50부 판사실. 20여분전쯤 출근한 배석 오석준 (吳碩埈) 판사가 조간신문 경제면의 기업동향과 기업공시부분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서기과 직원이 법정관리기업들의 신청서가 들어있는 두툼한 결재판을 책상위에 올려 놓았다.

"경상비 확보를 위해 재규어.벤츠등 의전및 임원용 차량 10여대를 경매처분하려니 허가해달라. " (K건설) "영업활동에 필요해 용인지역 골프장 회원권을 1억원에 사려하니 허가해 달라. " (K열관리회사) 吳판사는 그 자리에서 K건설의 신청서에는 '허가' 고무도장을 찍고 K열관리회사 신청서에는 '불허' 도장을 찍었다.

민사합의50부 판사들은 법관이라기보다 거의 전문경영인에 가까운 생각으로 일을 한다.

때문에 동료 법관들도 농담삼아 재판장인 이규홍 (李揆弘) 부장판사를 회장, 배석하는 오석준.서경환 (徐慶桓).정준영 (鄭晙永) 판사등 3명을 각각 사장이라 부른다.

현재 관리중인 회사는 모두 62개에 총자산은 35조원으로 재계 4위에 해당하는 규모. 법정관리기업들의 경비지출과 각종 허가신청 결재등 눈코 뜰새없이 바쁜 업무특성 때문에 전국 법원의 합의재판부 가운데 유일하게 판사 4명으로 구성돼있다.

재판부는 보통 1천만원 이상만 결재한다.

그러나 기아자동차의 경우는 5천만원 이상이고 한보철강은 지출규모가 큰 업체인데다 공신력 있는 포철의 위탁경영을 받고 있는 점을 감안해 5억원 이상만 결재를 받도록 했다.

법정관리 기업에 어느 정도의 자율경영도 보장해줄겸 판사 업무부담도 덜기 위해 회사규모에 따라 일정액 이상의 지출.수입에만 결재를 받도록 해놓은 것이다.

50부 판사들에게는 법정관리회사들에 대한 결재업무 못지않게 가처분사건 처리도 큰 부담이다.

최근에만도 김대중 (金大中) 국민회의 총재측에서 모 잡지사를 상대로 낸 잡지배포금지 가처분사건과 동아건설 최원석 (崔元碩) 회장이 부인을 상대로 낸 주식처분금지 가처분 사건등이 모두 이 재판부에서 처리됐다.

오전11시쯤부터는 판사실 앞에 법정관리및 화의절차가 진행중인 회사 관계자.채권은행 직원.변호사등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부속실 소파도 모자라 복도에까지 줄을 선다.

오후2시 吳판사를 찾아온 아시아자동차 자금담당상무는 2천억원에 달하는 부도어음을 신규어음으로 교체해 달라고 신청하자 吳판사는 그 자리에서 허가했다.

채권은행단과 협의가 끝난 사항이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가장 조용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오후7시~11시. 이 시간에 각종 가처분 신청과 기업인수.합병 (M&A) 관련 신청사건 기록을 꼼꼼히 검토해 다음날 허가여부를 결정한다.

吳판사는 "매일 몸이 파김치가 되지만 회생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기업종사자들을 생각하며 기업 정상화에 우리부 판사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버틴다" 고 말했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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