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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반 위 연아의 시선처럼, 고혹적인 죽음의 여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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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10면

1 ‘무덤 파는 일꾼의 죽음’(1895~1900), 카를로스 슈바베 작, 수채와 구아슈, 75ⅹ55.5㎝, 루브르 박물관, 파리 2 ‘죽음의 무도’(1463년께), 베른트 노트케 작, 성 니굴리스테 교회당, 탈린 3 김연아 사진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는 원래 죽음의 신이 한밤중에 묘지에서 바이올린을 켜면 백골만 남은 주검들이 무덤에서 나와 뼈를 달각거리며 춤을 춘다는 기괴한 내용의 시를 바탕으로 한 음악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바이올린 선율을 들으며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사람이 많으리라. 반짝이는 검은 의상을 입고 하얀 얼음을 가로지르며 눈부시게 도약하고 회전하는 한 소녀 말이다. 프랑스어로 ‘당스 마카브르(Danse Macabre)’라고 하는 이 곡은 피겨스케이터 김연아의 이번 시즌 쇼트프로그램 테마가 되면서 대중에게도 친숙해졌다.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이 프로그램의 시작과 끝에서 김연아가 검은 아이라인이 그려진 눈으로 도도하고 차가우면서도 고혹적인 시선(사진3)을 던질 때는 스위스의 상징주의(Symbolism) 화가 카를로스 슈바베(1877~1926)의 그림 속 죽음의 신이 연상된다. 이 그림(사진1)은 한평생 다른 사람들의 무덤을 파면서 살아온 노쇠한 일꾼이 이제 자신의 죽음을 맞게 되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을 다룬 작품이다. 일꾼의 영혼을 거두러 온, 거대한 검은 날개를 반쯤 펼친 죽음의 천사가 섬뜩하면서도 아름답다.

유럽 미술사에서 죽음의 신이 매혹적으로 묘사된 것은 19세기 초 낭만주의가 유행한 이후부터였다. 그전까지 의인화된 죽음의 모습이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해골이거나 부패한 시체였다. 해골로 형상화된 죽음은 중세 말기부터 유럽 회화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발트해 연안의 으뜸가는 화가였던 베른트 노트케(1435~1508)의 그림(사진2)이 바로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독일어로 ‘토텐탄츠(Totentanz)’, 바로 ‘죽음의 무도’라는 뜻이다.

이 그림을 보면 기괴한 미소를 띠며 춤을 추는 해골들이 칼과 보주를 든 왕과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걸친 왕비를 끌어가고 있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남아 있는 그림 부분에는 교황·주교·영주 등이 역시 춤추는 해골들에게 끌려가고 있으며, 예전에 사라져 버린 뒷부분에는 상인과 농노 등 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남녀노소·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순 없으며, 죽음 앞에서는 부귀영화도 덧없다는 것이 이 그림의 주제인 것이다. 이 ‘죽음의 무도’는 연극으로도 상연되었다고 하고, 노트케 외에 많은 화가가 비슷한 형식으로 교회 묘지에 그리곤 했다. 그리고 이 테마가 점차 음악이나 소설에도 쓰이게 되어 후대에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나오게 된 것이다.

왜 중세 말기에 ‘죽음의 무도’를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또 죽음의 화신을 흉측한 모습으로만 그렸을까. 당시는 페스트(흑사병)가 유럽 전역을 초토화하며 인구의 3분의 1의 목숨을 거둬간 때였다. 시신을 거둘 손도 모자라 시체가 집과 거리에 방치돼 부패해 가는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폐병에 걸려 창백한 얼굴로 연인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나는 춘희 비올레타의 서글픈 감미로움 같은 것이 페스트로 인한 떼죽음에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이런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더욱 매달린 반면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춤과 환락을 즐겼다고 한다. 여기에서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종교적 교훈과 삶의 마지막 환희인 춤이 결합된 ‘죽음의 무도’가 탄생한 것이다.

서양의 미술·음악·문학작품 중에는 제목이 꼭 ‘죽음의 무도’가 아니더라도 ‘죽음의 무도’ 테마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공포·환상문학의 거장 에드거 앨런 포(1809~49)의 단편소설 ‘붉은 죽음의 가면’이다. 어느 지역에 ‘붉은 죽음(Red Death)’이라는, 걸리면 온통 피땀을 흘리며 죽게 되는 끔찍한 전염병이 창궐하자 영주와 귀족들은 병자들은 버려둔 채 고립된 성으로 피신해 버리고 거기에서 갖가지 향락에 열중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화려한 가장무도회에 숨어 들어온 ‘붉은 죽음’의 화신과 만나게 된다.

현대에 와서는 월트 디즈니의 초기 애니메이션 ‘실리 심포니즈’(1929)의 유머러스하고도 섬뜩한 ‘해골의 춤’에서 ‘죽음의 무도’ 테마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김연아의 ‘죽음의 무도’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죽음의 신과 죽음의 신에게 끌려가는 희생자를 모두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과 마지막에 싸늘하고 강렬한 미소를 머금을 때는 죽음의 신을 연기하고 있고, 후반부에 직선 스텝 시퀀스에서 애처로운 표정으로 팔을 들어 무언가를 막는 듯한 동작을 보일 때는 죽음의 신을 대면한 희생자를 연기하고 있다. 데이비드 윌슨의 섬세한 안무나 그 안무를 100% 이상 표현해내는 김연아의 능력이나 모두 감탄스럽다.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그녀는 어떤 ‘죽음의 무도’를 보여 줄까?


중앙데일리 경제산업팀 기자. 일상 속에서 명화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며,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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