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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2> 대한민국 국회의장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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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국회 본관 로텐더홀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신익희 전 국회의장의 동상이 있다. 대한민국 국회 지도자의 동상으론 유이(唯二)하다. 두 사람 모두 제헌 의회에서 의장을 지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상은 2000년에야 세워졌다. 당시 박준규 의장은 “의회민주주의 52년 만에 지도자 동상을 세우게 되니 그동안 머뭇거린 우리의 어리석음과 사관(史觀)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이렇듯 국회의장의 자리는 미묘하다.

국가 서열론 분명하다. 국가 공식 행사에서 대통령의 바로 다음 자리다. 전용차도 2005년까지 대통령(1호차)에 이어 2호차였다(김원기 의장 시절부터 ‘1001’번호판을 달았다). 권한도 적지 않다. 국회법에 ‘의장은 국회를 대표하고 의사를 정리하며 회의장 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무를 감독한다’고 돼 있다. 이른바 ▶국회 대표권 ▶의사정리권 ▶질서유지권 ▶사무감독권이다. 국회 대표권은 말 그대로 대내외적으로 의장이 국회를 대표한다는 얘기다. 정기국회나 임시국회의 집회 공고가 모두 의장 이름으로 이뤄진다. 총리 또는 장관들에게 보내는 국회 출석요구서도 마찬가지다. 의사정리권과 질서유지권은 근래 여야 대치 상황에서 널리 알려진 권한이다. 의사정리권 중에선 특히 직권상정이 주목받곤 하지만 본회의의 개의와 산회, 의사일정, 위원회 회부 여부와 의사 수정, 표결 등 의사 전반에서 의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밖에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법률 공포권을 의장이 행사할 때도 있다. 국회에서 재의결되거나 공포 또는 재의 요구 기간을 넘겨 확정된 법률을 대통령이 5일 이내에 공포하지 않는 경우다. 의장은 또 국회의원이 품위유지에 어긋나게 겸직할 경우 사임을 권고할 수도 있다.

의장이 그렇다고 이런 권한을 다 쓸 순 없다. 일종의 모순적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의장으로선 공평해야 하지만 동시에 효율성도 감안해야 한다. 공평하다는 얘기는 소수 즉 야당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효율성은 정반대다. 다수의 견해가 주로 관철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인간적으로 어려운 처지다. 의장은 의장으로 선출되기 전 대부분 여당의 최다선급 중진이었다. 대통령과의 신뢰 관계도 있다. 임기가 끝나면 다시 여당 의원 신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의장을 하는 동안엔 중립적인 의회 지도자로 운신하길 요구받는다. 2002년부턴 의장 재임 중엔 무소속이어야 한다는 규정까지 도입된 마당이다.

김영삼(YS) 대통령 시절 황낙주 국회의장이 딱 그런 케이스였다. “지금 김형오 의장이 하는 걸 보니 과거 황낙주 의장하고 비슷하다.” YS가 올 초 한 말이다. 입법 전쟁 와중에 김 의장이 여야 간 합의를 종용, 결국 쟁점 법안의 처리만 지연시킨 걸 비판한 것이다. 실제 황 의장은 부의장 시절인 1993년 말 여당이 예산안을 단독 처리할 때 직접 의사봉을 잡았다. 그러나 의장 때인 95년 민주당이 통합선거법안의 직권상정을 막기 위해 의장 공관을 점거했을 때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열흘 넘게 억류당했다. YS가 경호권을 발동하라고 노발대발했는데도 말이다. 황 의장이 지금도 YS의 ‘욕’을 먹는 이유다.

역대 의장들은 그래서 ‘균형점’에 대해 고심했다. 정일권 의장의 경우 집무실에 ‘중용(中庸)’이란 휘호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러곤 틈날 때마다 여야 의원들에게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자”고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또한 75년 부의장을 통해 ‘변칙 처리’한 기록이 있다. 외국인에게 국가 등에 대한 모욕이나 비방을 하면 처벌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에 대해 야당이 본회의 점거로 맞서자 특위 회의실에 따로 모여 처리했었다.

권한 자체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효상 의장은 67년 총선 이후 야당이 부정선거를 이유로 8개월여간 등원을 거부하자 여당만으로 국회를 운영한 일이 있다. 지금과 달리 상임위 선임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유신 치하에선 “국회 운영의 능률성을 도모하겠다”며 의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전문가들은 당시에 대해 “대통령의 의지를 국회에서 실현하는 대변자로서 강화된 것일 뿐 국회의 권한은 약해졌다”고 평한다. 87년 민주화 이후엔 반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의장의 권한은 줄이고 국회의 권한은 늘리는 쪽이다. 국회 운영 전반에 대해 원내대표 또는 국회운영위와 협의하도록 한 게 그 예다. 그렇다 보니 여야 간 싸움만 벌어질 뿐 결론이 나지 않는 일이 빈번해졌다. 과거 ‘날치기’ ‘강행 처리’가 문제였다면 이젠 ‘불임 국회’를 걱정할 때란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역대 의장들 이런 일 저런 일

15대 박준규 의장 선출 땐 점심 거른 채 6시간 투표

6시간14분. 1998년 8월 초 15대 국회의 후반기 의장을 선출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오전 10시27분에 시작한 투표는 오후 4시41분에서야 결과가 나왔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결선투표까지 갔다. 자유민주연합의 박준규 의장이 당선 소감으로 “제가 좀 출중했더라면 초장에 되었을 텐데 3차(결선)까지, 또 점심을 못 잡숫는 일을 보고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치적 격변기였다. DJP(김대중·김종필)의 공동여당은 정권교체에 성공했지만 의회 권력은 여전히 한나라당의 몫이었다. 한나라당은 과반에 육박했고(149석),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88석)-자민련(48석)은 136석에 그쳤다. 명백한 여소야대 상황이었다. 투표가 세 차례나 있었던 배경이다. 한나라당 오세응 후보와의 격차가 10표-5표-10표에 불과한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한나라당에서 10여 표의 이탈도 있었다. 공동여당은 이후 한나라당 의원들을 대거 영입했다. 한나라당에선 “여권이 join(입당) 또는 jail(투옥) 전략을 편다”(박헌기 의원)고 반발했다. 급속도로 냉각된 여야 관계는 김대중 정부 5년 내내 부담이 됐다. 어쨌거나 당시 의장 선거를 두고 “2대 국회 이후 48년 만에 진정한 자유경선이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2002년 하반기 의장 선거도 ‘헌정 사상 처음’이란 꼬리표가 달렸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박관용 의장이 당선됐기 때문이다. 그는 “헌정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웠다. 대통령이 지명하지 아니한 최초의 국회의장”이라고 감격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야당이라곤 하나 과반에 육박한 정당이었다(261석 중 130석). 박관용 의장은 야당 출신답게 국회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산안 시정연설을 대통령이 직접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재임 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의결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의장은 대통령이 지명하거나 동의하는 가운데 정해졌다. 대표적 인물이 이승만 정부의 2인자인 이기붕 의장이다. 그는 재임 중 ‘사사오입(四捨五入·반올림)’ 개헌을 주도해 헌정사에 오명을 남겼다.

박정희 시대엔 정일권 의장이 두드러진다. 그는 6년7개월이란 최장수 총리(1964년 5월~70년 12월)와 역대 두 번째 장수 의장(6년)이란 기록을 동시 보유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의 얼굴마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역대 최장수 의장은 역시 박정희 정부 시절의 이효상 의장(8년)이다.

유신 치하엔 대통령이 사실상 지명한 사람이 국회의장이 된 일도 있다. 백두진 의장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천하고 박 대통령 자신이 의장으로 있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힌 유신정우회(유정회) 소속이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이 임명한 의원을 국회의 대표인 의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여권이 이를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파란이 일었다. 이른바 ‘백두진 파동’이다.

제헌의회와 2대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여당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 창당한 게 51년이기 때문이다. 명망가인 이승만 박사와 신익희 선생이 의원들의 자유투표로 선출된 이유였다. 신 의장은 특히 “역대 의장 중 의장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장 시절 자신의 권한으로 의원 징계안을 두 건이나 회부하는 등 자신을 포함해 동료 의원에 대한 모욕적 발언이나 음해성 행동에 적극 대처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 김형오 국회의장은 여당 내에선 이례적으로 경선을 거쳐 의장 후보로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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