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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세계관이 뿌리, 세계화로 불붙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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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음모이론 문화…금융위기는 오바마 당선 시키려는 민주당ㆍ언론 합작품?
음모론이 없는 문화나 국가는 없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신앙, 세계화의 본산이라는 특성과 유럽에서 시작된 음모 이론의 전통이 미국에서 만나면서 흥미로운 문화 현상이 생성되고 있다. 최근에는 버락 오바마를 당선시키기 위해 민주당과 언론이 경제 위기를 유발했다는 음모이론도 제기됐다. 다음은 중앙Sunday 기사 전문.

‘진실은 저 너머에(The truth is out there)’라는 문구로 유명한 TV 시리즈 X파일은 미국 음모이론 문화의 대표적 아이콘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위대한 것과 위대한 것, 거대한 것과 거대한 것을 인과관계로 묶어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으로 믿기 쉽다. “위대한 인물은 조상이나 자손도 위대하다.” “위대한 인물은 어렸을 때도 위대했다.” “거대한 사건 뒤에는 거대한 원인이 있다.” 논리적 오류가 지적돼도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고 우상화를 시도하며 음모이론을 제시한다. 수박만 한 배가 떨어졌으면 그 전에 독수리만 한 까마귀가 날았어야 하는 것이다.

경제위기 노림수는 오바마 당선?

쑹훙빙은 『화폐전쟁』에서 최근 월스트리트발 경제위기를 포함해 18세기 이래 세계에서 일어난 굵직한 금융 사건의 배후에 도사린 검은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월스트리트발 세계 금융위기라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거대한 음모가 있다는 주장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화폐전쟁』에서 쑹훙빙은 위기의 본질이 국제 금융자본의 세계 지배 시도라고 주장한다. 아랍 지역에서는 금융위기가 의도하는 게 미국의 세계 지배, 팔레스타인 독립 저지, 아랍 국가들의 경제 수탈이라는 주장이 제시됐다.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사건과 경제위기를 연결 짓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해 12월 유명한 보수 논객인 러시 림보는 민주당이 버락 오마마를 당선시키기 위해 경제위기를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림보는 미국에서 은행과 자동차 산업이 국유화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림보는 오바마가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싫다는 사람이다. 림보의 말에 따르면 결국 세계 금융위기는 미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일어난 셈이다.

림보는 최근 자신을 악마로 만들려는 음모가 백악관에서 추진되고 있다며 오바마 대통령에게 토론을 제의했다. 미국 보수 세력의 다른 일각에서는 오바마를 당선시키기 위해 리버럴한 미국 언론이 경제위기를 부추겼다는 주장도 나왔다.

부시 행정부는 X파일 따라 했다?

노엄 촘스키(사진) MIT 교수는 9·11 음모이론을 부정한다. 그는 9·11 음모이론 때문에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국가의 범죄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미국인의 에너지가 투입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9·11테러 이후에도 세계무역센터 붕괴가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거대한 음모이론이 제기됐다. 원케트(Wonkette)라는 정치 풍자 사이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TV 시리즈 X파일에 나오는 내용을 따라 하고 있다며 9·11테러도 X파일에 나온다고 주장했다. X파일은 1990년대~2000년대 초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국은 음모이론의 천국이다.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버뮤다 삼각지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외계인 등에 대한 음모이론도 있지만 황당한 것도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음모이론이 나왔다. “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는 1966년 죽었다. 가짜로 대체됐다.” “무한 에너지가 개발됐으나 석유회사들이 그 활용을 방해하고 있다.” “링컨·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는 예수회다.” “클린턴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클린턴 주변 인물이 50~60명 타살됐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의학 산업을 밀어주기 위해 엉터리 영양소 섭취 기준을 발표해 미국에서 질병 발생률이 증가하고 있다.”

동서고금에 음모론이 없는 문화나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이슬람 등 종말론적 신앙을 문화적 배경으로 하는 나라에서는 음모이론이 역사주의적이다. 미국·유럽·중동에서 발생하는 음모이론은 역사에는 창조라는 시작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끝이 있다는 세계관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역사와 음모이론이 밀접히 연결돼 있다.
대니얼 파이프스라는 작가는 ‘음모이론적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세상의 겉모습은 기만적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음모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적은 항상 권력·명예·돈·섹스를 차지한다.” 프랭크 민츠라는 학자는 “역사의 전개에 음모이론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믿음”에 ‘음모주의(conspiracism)’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국은 ‘거대 음모이론의 시대’, 거대 음모이론의 ‘빅뱅’을 맞고 있다. 서구에 기왕에 있었던 음모이론이 세계화의 본산인 미국이라는 토양을 만난 것이다.
서구에는 바바리아 일루미나티라는 비밀조직과 시온 원로단이 세계 지배를 꿈꾼다는 음모이론이 제기돼 왔다. 바바리아 일루미나티는 계몽기인 1776년 창설된 비밀조직이다. 1920년대 이후에는 시온 원로단이라는 유대인 조직의 세계 정복 음모가 있다는 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됐다.

세계정부와 음모이론

이러한 배경에서 음모이론에 열광하는 미국 사람들은 주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 “국제적인 음모다. 무신론적 정부가 곧 등장한다. 성경에 모두 나와 있다.”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세계 단일 정부가 출범한다는 설은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 음모이론이라 불린다.

만약 세계 단일 정부가 출범한다면 미국이 이를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배경의 음모이론 추종자는 그러한 정부 출범에 반대한다. 세계 단일 정부는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무신론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유럽 통합, 세계화의 진전은 음모이론 추종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했다. 게다가 인터넷 등 정보통신의 발전은 음모이론의 유포를 더욱 활성화했다.

마이클 바컨이라는 학자는 『음모의 문화』(2003)라는 저서에서 음모이론이 미국 문화의 주류로 확산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에서 음모이론은 더 이상 문화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지 않다. 미국의 음모이론은 X파일이나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상산업과도 연계돼 있다. 음모이론이 사회 전체에 퍼지자 언론에서는 음모의 폭로를 목표로 하는 ‘음모 저널리즘(conspiracy journalism)’도 발달했다.

음모이론은 과학적 탐구 대상

여기서 음모이론(conspiracy theory)의 ‘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음모이론은 이론이다. 음모이론이라는 말은 1909년 사용되기 시작됐다. 이론은 어떤 현상을 기술·설명·예측하기 위해 고안된다. 물론 음모이론은 과학적 이론이 아닌 의사(擬似)이론일 뿐이다. 그러나 일종의 이론인 음모이론은 매우 정교하게 고안된다. 그만큼 각종 음모이론은 많은 사람을 포섭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세계 여러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의 정신적 건강성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미국은 멀쩡한 사람들이 황당한 음모이론을 믿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가.

다행히 음모이론은 미국에서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역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심리학·민속학 등의 분야에서 음모이론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돼 왔다. 그 결과 면밀한 학술적 추적 끝에 일부 음모는 역사적인 사실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예컨대 링컨 대통령 암살 음모는 실제 있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철학자인 칼 포퍼(1902~94)도 안심이 되게 하는 말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음모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반대로 음모는 전형적인 사회적 현상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류 역사는 음모이론에 대한 저항력이 충분히 있는 셈이다.

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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