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는 어디로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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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善花)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 왕자가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으로 즉위한 뒤 지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이 절의 건립 과정에서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을 보내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설화’란 시각이 많아 그 기록에 대한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으로 그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미륵사 창건 설화에 대한 의문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①전북 익산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 보수 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들. 왼쪽부터 원형함, 금제 사리호, 금제 사리 봉안기. 각종 구슬(앞쪽). ②사리공(사리장엄을 안치하는 공간)에서 발견될 당시의 금제 사리호(가운데)와 금제 사리봉 안기. ③은제관식(왼쪽 위)과 금제 소형판 등 유물. [문화재청 제공]


◆선화 공주 설화의 허구 가능성=이번에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기록돼 있다. 가람을 건립한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기해년 정월 29일(639년)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적혀 있다. 사택씨는 백제 8대 성족의 하나로 부여·공주 일대의 귀족이다. 즉 백제 무왕대에 왕비가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그 왕비가 선화 공주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 것이다. 사택적덕은 현재까지 기록에서 등장한 바 없다.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무왕의 부인이 몇 명인지 모르겠으나 그중 하나가 사택씨임이 밝혀진 것”이라며 “미륵사는 삼원(三院) 형식의 절이라 이번에 발굴된 서탑과 서쪽 가람만 사택씨의 왕후가 짓고, 나머지 가람은 다른 왕후들이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기축년(629년)이란 도장이 찍힌 기와가 이전에 출토된 점을 미뤄보면 중원의 목탑은 미륵사지석탑보다 10년 앞서 건립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리장엄이 보존된 까닭=미륵사는 삼원 병렬식 가람이다. 동탑과 중원의 목탑을 비롯한 가람 대부분이 소실되고 서탑인 미륵사지석탑만 일부 남아 있던 것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1년부터 해체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맨 아래층의 심주석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사리장엄이 일괄 수습된 것이다. 동탑과 목탑 자리에서는 사리장엄이 발굴되지 않았다. 또 서탑에 지렛대 자국이 남아 있는 등 도굴을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도 확인됐다. 배병선 미륵사지석탑 정비·보수단장은 “사리공(사리를 넣는 구멍) 위를 1.2t가량의 돌로 막고 회로 봉해 1400년 전의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기도 하다.

◆백제 미술의 정수=높이 13㎝짜리 금제사리호는 백제 미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연꽃잎, 당초 무늬와 연주문을 빼곡히 새기는 등 세련되면서도 섬세한 문양이 특징이다. 중국의 사각함과 달리 둥근 몸체에 긴 목을 지닌 사리함을 만든 것도 독특하다. X선으로 촬영한 결과 사리함 안에는 소형 사리병이 안치되어 있고, 외병으로 조립해 고정시킨 이중 구조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귀영 미술문화재 연구실장은 “사리 문양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백제화시킨 대단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은제관식 은 모자에 꽂았던 장식을 즉석에서 벗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익산=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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