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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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자,피의자 신문조서야.다시 한번 읽어보고 변경할 것이 없으면 여기다 서명하고 손도장 찍어.엄지 손가락으로 말이야.” 형사가 열 장쯤 돼보이는 피의자 신문조서를 우풍에게 내밀었다.우풍은 자기가 진술한대로 적혀 있으면 다시 읽어볼 필요가 뭐 있는가 싶어 그냥 볼펜으로 이름을 쓰고 손도장 찍을까 하다가 여기 신문조서에 적힌 구절 하나하나가 앞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한번 훑어보기로 하였다.

'…사법경찰리 순경 조기명은 사법경찰리 탁인구를 참여시키고 피의사건의 요지를 설명하고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알려준 즉 피의자는 신문에 따라 임의로 진술하겠다 하므로 다음과 같이 신문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피의자 신문조서는 문(問)과 답(答)란으로 나뉘어 있었다.성명.연령.주민등록번호.본적.주거.직업.직장.전과및 검찰처분 관계.상훈 연금 관계.병역.교육.경력.가족.재산및 월수입.종교.정당및 사회단체 가입.음주및 흡연량 등 기본 항목들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 후 본격적인 신문으로 들어갔다.

문:정신상태와 건강상태는 어떠합니까? 답:정신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몸도 별다른 병 없이 건강한 편입니다.

문:피의자는 칼을 들고 강간을 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있습니까? 답:없습니다.

문:1996년 9월30일 낮 12시경 ××구 ××동 351번지에 칼을 들고 침입하여 주부를 위협해서 옷을 벗으라고 하면서 강간을 하려고 한 사실이 있습니까? 답: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우유 배달 아주머니가 우유값을 받아간 후 현관문이 잠기지 않은 틈을 이용,침입하여 칼로 위협하며 강간을 하려고 한 것 아닙니까? 답:아닙니다.정말 아닙니다.

문:등산모와 마스크를 쓴 것은 범행을 할 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요? 답:그런 적이 없습니다.

문:그때 작업용 장갑도 준비하고 끼고 갔지요? 장갑을 낀 것은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그런 거지요? 답:장갑을 준비한 적도 낀 적도 없습니다.

문:피의자가 칼로 위협하자 주부가 엉겁결에 그 칼을 두 손으로 잡았는데,그 바람에 칼날 쪽을 쥔 주부의 오른손이 칼에 베이는 상처를 입었지요? 답:그런 일이 없습니다.

문:주부가 두 손으로 칼을 쥐었을 때 발로 주부의 어깨를 걷어찼지요? 답:그러지 않았습니다.

문:그럼 발로 어디를 찼나요? 답 :그런 일 없다니깐요. 문:주부가 뒤로 자빠지자 주부 위에 올라타 강제로 옷을 벗기려 했지요? 답:그런 적이 없습니다.

문:그때 피의자는 바지 지퍼를 내려 팬티가 다 드러났지요? 답:바지 지퍼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 글:조성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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