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희씨 일가 탈북 사상갈등.死線 넘은 진한 가족애의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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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탈북자 가족의 북한 탈출사건은 가족사랑이 빚어낸 승리의 드라마다.가족재회를 위한 이들의 대장정엔 사상적 갈등과 생명의 위험을 뛰어넘는 진한 가족애로 넘친다.

지난해 1월 귀순한 洪진희씨는 북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자신의 탈북사실 때문에 고초를 겪을 가족들 생각에 잠을 못이루다 위험을 무릅쓰고 어머니와 두 동생의 탈출을 설득했다.사상의 고리에 발목잡혀 번민하던 두 동생도 마침내 혈육의 정을 택했다.

이들이 탈출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두 동생의 사상적 갈등.

어머니 朱영희씨의 탈북결심을 전해들은 경화.진명씨는 처음엔 극력 반대했다.朱씨의 끈질긴 설득에 경화씨는 자신의 뜻을 바꿨지만 막내 진명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막무가내였다.

진명씨는“어떻게 형에 이어 나마저 조국을 저버리라는 말이냐”며 펄쩍 뛰었다.

朱씨가 거듭 호소했지만 진명씨는“형 때문에 산골로 추방돼 못견딜만큼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형을 얼마나 증오했는줄 아느냐.죽어도 형 있는 곳에는 갈 수 없다”고 버텼다.

진명씨는 어머니와 누나 경화씨가“그러면 너 혼자 북한에 있어라”고 최후통첩을 하자 마지못해 따라 나섰다.

진명씨가 완전히 마음을 돌린 것은 중국 남부도시 칭다오(靑島)에서 인편으로 전해진 형 진희씨의 편지를 읽고난 뒤다.

“나때문에 갖은 고생을 겪고도 그래도 혈육이라고 믿고 국경을 넘어왔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한 어머니 뱃속에서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의 인연인데 형을 믿어라”는 구절에 그동안 형을 원망해온 진명씨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진명씨는 형에게 보낸 답장에서 “21년간의 사상교육이 나의 발을 붙잡았으나 형이 있는 곳에서 가족이 함께 모여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결심을 털어놓았다.

중국의 발전상도 진명씨의 결심을 굳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칭다오에서 1차 망명에 실패하고 옌지(延吉)로 되돌아간 뒤 탈북에 적극적이던 경화씨가 갑자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깜짝 놀란 어머니 朱씨는 자신들을 돌봐주던 중국동포 친지와 상의끝에 중국 공안(경찰)을 매수,경화씨를'탈북혐의'로 체포하는 고육지책을 짜냈다.

중국인 공안원은 경화씨를 붙잡아 실제 국경지역까지 끌고갔다.

그는“북한에 되돌아가면 혹독한 처벌을 받게된다”고 간간이 경화씨를 위협했다.

경화씨는 결국 국경지방에 가서야 다시 어머니한테 돌아가겠다고 사정했고 매수당한 공안원은 마지못해 경화씨를 가족에게 되돌려주는 연극을 했다.

선전(深수)에 머무를때 중앙일보 취재팀과 만난 경화씨는“매일 시위만 일삼고 거지만 사는 남조선에 가서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북한으로 돌아가려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털어놓았다.朱씨는“떨어져 사는 아들을 만나려고 나섰는데 또다른 혈

육이 안가겠다고 버티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이 집을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뒤부터 서울의 진희씨는 가슴졸인 나날을 보냈다.

진희씨는 북한군 수산부업기지 외화벌이 요원으로 옌볜(延邊)일대를 돌때 사귄 중국동포를 통해 자신의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했고 탈출도 권유했다.

가족들이 중국으로 나온뒤론 한국행을 망설이는 두 동생을 설득하고 한편으론 안내인과 탈출루트를 선정하는가 하면 관계당국과도 협의하는등 정신없이 뛰었다.

“동생들이 망명을 반대한다고 할땐 앞이 캄캄했습니다.옌지로 전화를 걸어 동생을 설득하느라 진땀 뺐어요.동생들은'내 조국은 조선'이라고 막무가내였어요.”

진희씨는“남은 소원은 통일후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진세근.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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