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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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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25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기업 총수들과 간담회를 열고 경제활력 회복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재계는 기업별로 투자확대와 고용창출 의지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대통령은 기술혁신과 교육혁신을 강조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경영, 재계와 노동계의 대화와 타협을 주문했다. 전반적으로 새 출발의 의지를 가다듬은 회동이라고 보도됐다.

그러나 이날 회동에서는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대통령이 복귀 직후 행한 대국민 담화에 이어 이날 '실체 없는 경제위기론'을 다시 말했고 이에 대해 재계 총수들은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론이나 경제단체에서 제기하는 위기는 핵심에서 비켜나 있는 것 같다.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에게 불리한 정책을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위기를 확대해 주장하고 국민의 불안을 조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렇게 요약되는 것이 盧대통령이 말하는 실체 없는 경제위기론의 골자다.

국정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화합과 상생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거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적절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잘못된 것이다.

인류학자 앤더슨은 일찍이 그의 명저 '상상의 공동체'에서 신문을 '1일 베스트 셀러'라고 규정했다. 매일 일반 국민의 시선을 확 끌어당길 뉴스와 기사제목에 집착하는 언론의 속성을 예리하게 지적한 표현이다.

일찍부터 우리 재계는 이런 언론의 속성을 잘 활용해 왔다. 경기가 나빠지면 '성장잠재력이 무너져 내린다''정부의 경제상황 인식이 너무 안이하다'고 점잖게 일침을 가하면서 언론을 사주한다. 그러면 언론은 '경제가 죽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뭘 하느냐''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선동적으로 나온다. 이에 정치권이 가세해 정부가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을 완화하고 경기부양책을 쓴다.

나는 일찍이 이런 '정경언 유착'의 경제정책 패턴이 우리 경제를 냄비경제로 만들어 왔다고 분석했다. 경제학계는 1970년대부터 재벌공화국체제와 성장우선주의를 벗어나 균형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이런 학계의 '지혜'에 비추어 볼 때 참여정부가 시장개혁과 균형발전을 강조하고 재계의 나팔수 노릇을 해 온 언론을 경계하는 것은 타당하게 보인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의 구조조정과 급변하는 국제환경의 변화는 학계의 '지혜'도 변하게 만들었다. 기업구조조정은 위기 이전이라면 아무리 떠들어도 결코 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경직된 노동시장과 지나친 정부규제, 그리고 국법 위에 있는 국민정서법과 떼법은 국가경쟁력을 옥죄고 있다. 이 때문에 외국인 직접투자는 갈수록 저조하고 제조업 공동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앞으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보다 더한 만성적인 침체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 경제는 몇년 안에 우리 경제를 속국경제로 만들 정도로 무섭게 부상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현실에 대해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세계화시대에 80년대식의 균형발전과 경제력집중 억제의 논리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한다면 하향 평등화를 낳기 십상이다. 잘하는 부분을 더욱 북돋우고 거기에서 나오는 잉여로 사회적 약자를 부추기는 것이 새 시대의 올바른 논리다.

대통령의 발언은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는 좋은 말이지만 이런 새 시대의 논리와 어긋난다. 법치가 우롱되게 마련인 사회적 힘의 균형논리와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것이 더욱 그렇다.

시대가 변하고 언론의 위상도 바뀌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공공부문의 비효율성, 국민의 법 경시와 반기업 정서를 앞장서 바로잡으면서 흑묘백묘 식의 실용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대통령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일들을 제쳐 두고 부차적인 일들에 옛 운동권 논리식으로 접근하고 각 정부부처가 여기에 코드를 맞추려 들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우리 경제를 불안하게 보는 것이다.

안국신 중앙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