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화제작기행>"빨래하는 사내들" 제프리 로빈슨 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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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레이건 행정부는 79년의 혁명 이래 관계를 단절하고 있던 이란과 대화창구를 만들고 싶었다.이로부터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판매하는 거래가 생겨났다. 이 거래의 실무를 맡은 국가안보회의(NSC)보좌관 노스중령은85년부터 카쇼기의 이스라엘 군부를 통해 수천대의 토미사일을 이란에 팔았다. 그런데 이 장사가 너무 잘됐다.85년 1년간 미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1천2백만달러에 사들인 미사일이 이란에는 3천만달러에 팔렸다.세무서에 신고도 할 수 없는 이익금 수천만달러가 생긴 것이다.이 이익금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 결국 이 돈은 니카라과의 친미반군을 지원하는데 쓰인 것으로 이란-콘트라 청문회에서 밝혀졌다.미국의 베스트셀러 저자인 제프리 로빈슨이 쓴.빨래하는 사내들'(원제 The Laundrymen.아케이드 刊)에는 이 돈이 스위스.바하마.버 뮤다의 여러은행에서 파나마 국적 회사들의 계좌를 통해 세탁되는 과정이 소상히 설명돼 있다. 미국 국가기관이 극악한 범죄자들과 똑같은 수법을 써가며 국제관계에 임하는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그러나 로빈슨이 밝히는 돈세탁의 원리를 살피면 권력과 범죄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돈세탁의첫번째 원리는 돈 주인과 돈의 유래가 감춰져야 하는 것이다.권력이 비밀을 필요로 하고 돈이 권력의 주요한 매 체인 한 권력에는 돈세탁이 없을 수 없다. 우리에게도 낯선 일이 아니지만 권력자중에는 애초 범죄형 권력자들이 있다.권력의 일부를 재산의 형태로 감춰놓는 것은 이들에게 본연의 업무라 할 것이다.그러나 미국처럼 합리적으로 운용되는 정치체제에도 검은 돈의 역할이 있다는 것은 깨 끗한 주택에도 어디엔가 변기는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미국 권력체제의 대표적인 변기로 로빈슨이 꼽는 것은 단연 CIA다.47년 창설되면서부터 CIA는 각종 비밀공작에 몰두해 왔다.CIA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장벽이 소위.5412위원회'다.CIA는 그 예산과 주요 활동을 국무장관.국방 장관.안보담당보좌관.CIA국장등으로 구성되는 이 위원회에만 보고하고 대통령에게는 보고하지 않는 것으로 돼있다.이란-콘트라 같은 일이 터졌을 때 대통령의 개입을 부인하는 방패막이인 셈이다. 아무리 밝은 세상에도 그늘은 있듯 자유주의는 일부의 범죄를 필요악으로 받아들인다.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일부 검은돈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늘이 세상을 덮어버릴 지경이 된다면 체제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로빈슨은 연간 3천억~5천억달러로 추정되는 돈세탁 산업이 외환과 석유에 이어 단일산업으로는 세계 제3의 규모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80년대 이래 돈세탁시장의 최대고객은 마약범죄자들이다.최근까지 마약시장을 지배해온 콜롬비아 마약카르텔의 엄청난 사업규모는중남미지역의 경제풍토를 통째로 바꿔놓았다. 지난 90년 미국정부는 15억달러의 지원자금을 가지고 이 지역 국가들에 마약작물을 다른 농작물로 대체하는 사업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그 정도 돈을 몽땅 한 나라에만 지원해도 효과를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성기 콜롬비아 마약카르텔 사업규모는 1천억달러를 상회한 것으로 추정된다.전세계에 이보다 GNP가 더 큰 나라도 몇 안된다. 콜롬비아와 카르텔의 관계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뇌물이라는 당근과 암살이라는 채찍이 온 나라를 휘어잡았다. 현직 판사가 미국에 마약을 들여가다 잡히는가 하면 카르텔의 뇌물추문에 휩싸인 삼페르 대통령이 미국 비자를 취소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미국은 비상한 노력을 들여 최근 콜롬비아 마약카르텔을 분쇄했지만 멕시코 카르텔이 그 뒤를 잇고 있다.미국시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약카르텔은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며 계속 돈세탁시장의발전을 주도할 것이다. 돈세탁이 범죄와 권력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촉매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도 겪고 있는 일이거니와 자본주의체제를 안에서부터 위협하는 가장 큰 독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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