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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진실규명 거리먼 공갈정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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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보부도사태는 이른바 공갈정치.루머정치를 활성화하고 있다.의혹이 큰 사건인 만큼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행태가 어느 정도 나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사태의 성격상 야당이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여권실세들에게 1조5천억원이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 있다”(자민련 李圭陽부대변인),“한보에 대한 천문학적 대출에 민주계의 젊은 부통령이 개입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자민련 安澤秀대변인),“대통령도 필요하면 조사를 받아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국민회의 金大中총재)…. 어떻게 보면 마구잡이식 돌던지기라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야권은 동시에 이런 루머를 사실인양 국민에게 인식시키기 위해“확실한 비리정보를 입수해 놓은 상태”“핵폭탄급 증거가 있다”고 흘렸다. 여당도 질 상대가 아니다.즉각 원색적 반응이 뒤따랐다. “여당이 가진 정보와 역량을 총동원해 대응하겠다”(金哲대변인),“정보야 아무래도 여당이 많지 않겠나”(姜三載사무총장)…. 여당의 반격은 비리연루 여부에 대한 진상규명과는 거리가 먼순전히 야당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인상이 짙다.뭐 묻은 개가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느냐는 협박성이라는 얘기다. 이 판에 당사자인 한보 정태수(鄭泰守)총회장까지 가세했다.“은행이 지원약속을 어겨 부도가 났다”“한보 음해세력이 있다….”그의 말대로라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셈이고 음해세력과 한판 붙겠다는 의지마저 묻어 나온다. 이런 지경이고 보니 진실이 뭐냐는 가장 핵심사는 오히려 뒷전에 가려지는 형세가 되고 있다. 물론 상대에 대한 경고나 위협성 언동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지난 정권의 5공청산 과정에서“내가 입을 열면 여러 사람 다친다”(張世東전안기부장)는 말을 필두로 수서사건,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씨 비자금 사건등 정국의 분수령 이 되는 중요한 고비마다“나만 당하지는 않을 것”이란 반발과 협박이 있었다. 또한 그때마다 비자금리스트니 뭐니 하는 괴문서들이 나돌았다.루머가 춤을 췄다.이런 소문들은 여과없이 폭로됐고“증거가 있다”는 장담이 뒤따랐다.하지만 매번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고 설(說)들은 연기처럼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빈자리에는 실체적 진실 대신 상처와 서로에 대한 증오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다행히 국민회의가 28일 확보한 중대 증거 하나의 공개를 예고한 만큼 이를 계기로 사실규명에 주력하는 정치권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길 간절히 촉구한다.김교준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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